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또 탄핵…트럼프, 다음 대선 출마 사실상 불가능

‘국가에 대한 무장 반란 선동’으로 두 번째 탄핵안,
임기 종료 7일 앞두고 하원 통과… 다음 대선 출마 사실상 봉쇄
등록 2021-01-15 17:13 수정 2021-01-19 10:09
2021년 1월13일 오후(현지시각) 낸시 펠로시 미국 의회 하원의장(앞줄 테이블)이 표결로 채택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 서명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1년 1월13일 오후(현지시각) 낸시 펠로시 미국 의회 하원의장(앞줄 테이블)이 표결로 채택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 서명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찬성 232표, 반대 197표. 대통령 탄핵 결의안이 재의를 요구하는 반대 의견이 없이 채택됐습니다.”

공화당 의원도 10명 가세

2021년 1월13일 오후 4시36분(이하 현지시각), 낸시 펠로시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장(민주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안이 통과됐음을 선포하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민주당 의원 모두가 탄핵 찬성표를 던졌고, 집권 공화당에서도 10명이 가세했다. 표결 전 토론에서 펠로시 의장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우리 공동의 국가에 대한 무장 반란을 선동했다”며 “그는 물러나야 한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 나라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다”라고 질타했다.

앞서 1월6일 트럼프를 지지하는 수백 명의 ‘폭도’가 미국 전역에서 워싱턴으로 몰려와 연방의회 의사당을 폭력적으로 점거하고 난동을 부린 사태가 엄청난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1월20일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의 취임을 눈앞에 둔 정권교체기의 미국 사회는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하원의 탄핵은 의회 난입 사태가 있은 지 일주일 만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트럼프는 1월20일 임기 만료를 꼭 일주일 앞두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재임 중 두 번씩이나 탄핵당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2019년 12월엔 하원이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문제 삼아 탄핵을 의결했으나, 상원에서 부결됐다.

이번에도 하원의 탄핵 의결이 실제로 트럼프의 임기 중 축출로 이어지진 않을 것 같다.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과 달리,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 50석을 차지해 어느 당도 탄핵 의결 정족수에 필요한 3분의 2(67석)에 못 미친다. 그러나 트럼프가 다음 대선에서 또다시 출마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봉쇄됐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공화당이 정치적 이유로 트럼프 탄핵을 반대한데다 의사 일정도 촉박하지만, 무엇보다 공화당의 예비 대선 주자들이 트럼프의 재출마를 바라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어떤 식으로든 트럼프에게 이번 사태의 정치적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상원은 트럼프 퇴임 뒤 탄핵 심판을 진행할 계획이다.

미국 언론과 정치권,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선 트럼프에게 수정헌법 제14조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미국 수정헌법 제14조는 “미합중국의 연방의회 또는 사법, 행정기관에서 취임 선서를 했던 사람 중에서 반란에 개입했거나 폭동을 지원했거나 편의를 제공한 자는 그 누구도 다시는 연방 상·하원 의원과 정·부통령 같은 선출직, 행정부, 민간 또는 군의 직위를 가질 수 없다”(3항)고 규정한다. 또 5항에선 “연방의회는 적절한 입법으로 이 조항을 집행할 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뿌리째 흔들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텔레비전으로 하원의 탄핵안 표결을 지켜본 뒤 트위터에 5분가량의 영상 논평을 올렸다. “폭도들의 폭력은 내가 믿고 우리 운동이 지지하는 모든 것에 반한다. 진정한 나의 지지자는 정치적 폭력을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선동한 시위가 극단적 폭력으로 비화한데다, 정치적 책임뿐 아니라 내란 선동 혐의로 형사 기소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자 잔뜩 몸을 낮추는 모양새다.

그러나 이는 의회 폭력 사태 직후까지도 보인 태도와는 정반대다. 앞서 202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트럼프는 트위터에 짤막하지만 강력한 폭발성을 내장한 메시지를 올렸다. “(2021년) 1월6일 워싱턴에서 대규모 시위. 그곳에 있으라. 거칠고 재미있을 것이다.” 이어 12월27일에도 “이번 대선은 미국 역사상 최대 사기극이었다. 1월6일 워싱턴DC에서 만나자”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2021년 1월6일, 미국과 세계는 미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구심이자 상징인 연방의회 의사당이 외부의 적이 아닌 자국 시민에게 침탈당하는 모습을 실시간 뉴스로 지켜봐야 했다. 미국 역사상 초유의 의회 난입 사태로 경찰관 1명을 포함해 5명이 숨졌다. 집권 공화당에서조차 “미쳤다” “쿠데타 시도” “테러리스트들”이란 통탄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사건 직후에도 트위터로 “이런 일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부당하게 대우받아온 위대한 애국자들에게서 성스러운 압승이 인정사정없이 악랄하게 사라졌을 때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의회 점거 폭동은 미국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믿음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정치적 의견이 테러를 연상케 하는 극단적 폭력 사태로 표출되리라곤 트럼프 시대 이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국 시사주간 <네이션>은 1월13일 ‘국민 대화: 반란 2021’이란 주제로 전문가와 언론인, 시민이 참여하는 공개토론을 열기도 했다. 이 잡지는 “의회 폭력 점거 사태는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고, 미국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는 기존 믿음은 착각이었다”며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동은 미국 사회 내부 적들의 위험성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극우 음모론 단체, 중범죄자들도 가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내부의 적’이란 낙인까지 찍힌 트럼프 지지 극단주의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최근 통신은 의회 난동으로 기소에 직면한 혐의자들의 소셜미디어와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분석하고 피의자 주변의 증언을 채취해 보도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폭동 가담자 대다수가 백인우월주의자, 극우민병대, 공화당원, 공화당 정치자금 기부자, 극우 음모론 단체인 큐어넌 지지자였고 살인미수범을 포함해 중범죄자도 섞여 있었다.

 손주를 둔 할아버지인 로니 코프먼(70, 앨라배마)은 M4 공격용 소총과 권총 3정, 실탄으로 채워진 탄창, 심지어 네이팜유를 채운 화염병까지 트럭에 싣고 왔다. 조지아주 출신의 한 남성은 지인들에게 “5.56㎜ 장갑관통탄을 무더기로 갖고 워싱턴으로 향한다. 펠로시(하원의장)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는 걸 상상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큐어넌 신봉자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띈다. 큐어넌은 “사탄을 숭배하는 소아성애자들이 주축인 비밀 조직(딥 스테이트)이 미국과 세계를 은밀하게 지배하고 있으며, 힐러리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민주당 인사들도 그 일원”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사악한 도당과 맞서 싸우는 구원자”이다. 허무맹랑하거나 전혀 근거가 없는 비현실적 미신이지만, 큐어넌 신봉자들은 그런 믿음으로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자녀를 키우는 40대 여성은 딥 스테이트가 어린아이들을 노린다는 식의 음모론을 지지하는 가짜 뉴스들을 페이스북에 다수 공유했다. 의회 난동 사태 때 짐승의 뿔이 달린 가죽 털 모자를 쓰고,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웃통을 벗은 채, 성조기를 매단 창을 들고 포효했던 제이크 챈슬리는 자신이 ‘큐어넌 샤먼(주술사)’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충격적 사태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1월20일 조 바이든이 제46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의회 폭동 사태 이후, 트럼프 지지 시위를 촉구했던 극우 성향 웹사이트인 ‘와일드 프로테스트’와 ‘미국을 구하는 행진’ 등은 갑자기 먹통이 됐다. 그러나 그 지도부가 트럼프의 대선 패배를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위한 여성들’의 에이미 크레머 대표는 “조 바이든은 결코 나의 대통령이 아닐 것”이란 트위트를 날렸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