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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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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 중국인 시어머니는 “넌 그런 여자가 아니구나”

중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
‘전족’에서는 해방됐지만 불법 낙태와 가정폭력, 현모양처라는 굴레에 갇혀
등록 2021-02-02 12:59 수정 2021-02-05 01:40
사회주의 중국에선 대다수 중국 여성이 전족을 한 채 평생을 뒤뚱거리며 살았지만, 신중국에서는 하이힐을 신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쌩쌩 달린다. 베이징 알리바바 본사 사거리에서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은 여성.

사회주의 중국에선 대다수 중국 여성이 전족을 한 채 평생을 뒤뚱거리며 살았지만, 신중국에서는 하이힐을 신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쌩쌩 달린다. 베이징 알리바바 본사 사거리에서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은 여성.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펄럭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중국 여자들은 한때 나의 로망이자 롤모델이었다. 아침이면 출근길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워 학교나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퇴근길에는 시장을 봐서 자전거 앞바구니에 싣고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밥을 짓는 ‘영화 속’ 중국 남자도 한때 내가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던 이상형이었다. ‘한국형 결혼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부 갈등이나 명절 스트레스 따윈 상상할 수도 없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웃기는 얘기고, 중국 여자들의 결혼 세계는 평등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중국을 해방시키면서 전족을 하고 다니던 중국 여성들의 삶도 ‘해방시켰다’고 했기 때문이다. 꽁꽁 묶여 전족을 하고 평생 뒤뚱뒤뚱 걸으며 남편과 시댁의 ‘소유물’로 살던 중국 여성들은, 공산당이 이끄는 신중국에선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펄럭이며 자전거를 타고 온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는 ‘해방된’ 여성이 됐다.

나는 ‘억세게 운 좋게도’ 한때 내가 꿈꾸던 이상형인 ‘중국 남자’와 결혼했고 “이제 너는 내 딸이니 나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말하는, 한때 내 롤모델이던 중국 여성을 시어머니로 두게 됐다. 그 뒤 나는 남편 형들의 아내인 중국 동서 2명이 생겼고, 샤오왕과 슈친이라는 중국 여자들과도 허물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하이힐 신고 자전거 타는 여성들

1943년생인 시어머니의 가족사와 살아온 인생 이야기는 그 자체가 중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생부가 병으로 일찍 죽은 뒤, 개가한 엄마를 따라 계부 밑에서 자란 시어머니는 중학교 졸업 뒤 후베이의 한 초등학교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동료 교사의 중매로 만난 시아버지 역시 그 지역 중·고등학교 교사였고, 둘은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결혼해 아들만 셋을 낳았다.

시부모는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우파 숙청 등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혁명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남았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죽기 살기로 버텨냈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가정은 마오쩌둥의 ‘작은 붉은 책자’(마오쩌둥 어록집)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목숨줄’이었다. 막내인 남편은 공부를 잘하고 말도 잘 들어서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던’, 시어머니에게 자부심이자 긍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느닷없이 ‘외국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결혼을 선언하자 시어머니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동네 은행장과 경찰서장 등 지역 내 온갖 권력자의 집안에서 중매쟁이를 내세워 ‘사돈 맺기’를 요청했지만 자유연애를 주장하며 거절하던 막내아들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심지어 외모도 별로인 한국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그만 아연실색했다.

“외국 여자를 뭘 믿고 결혼하냐”며 펄쩍 뛰던 시어머니가 결정적으로 마음이 누그러지게 된 것은, 당시 중국에서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보고 나서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하희라를 한국 여자들의 상징이라 여기고, 그 정도로 현모양처이면 ‘우리 아들이 행복하게 살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나와 사이가 틀어져서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나에 대한 진심을 ‘폭로’했다. “나는 네가 <사랑이 뭐길래>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처럼 남편 내조 잘하고 시부모 공경하며 아이들도 잘 키워내는 현모양처인 줄 알았다. 한국 여자는 대부분 다 그런 줄 알고 처음에는 속으로 너를 반겼다. 하지만 살아보니 넌 그런 여자가 아니더구나. 미리 알았다면 내가 너를 어찌 며느리로 삼았겠니.”

마오쩌둥 시절 혹독한 ‘계급혁명’을 경험하며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성관에서 철저하게 ‘해방된’ 줄 알았던 시어머니 입에서 ‘현모양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죽은 마오쩌둥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었다. “우리 시어머니는 왜 여전히 사상개조가 안 된 겁니까? 현모양처라뇨!”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가정폭력

샤오왕은 내가 첫째 아이를 낳은 뒤 인력소개소를 통해 찾은 가사도우미다. 나이가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아,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안후이성 출신인 샤오왕은 종일 가사도우미 한 달 월급 600위안(당시 환율로 약 8만원)이 미안할 정도로 요리와 가사를 프로급으로 해냈다. 샤오왕은 일찍 결혼해 고향에서 시부모가 키우는 아이 나이가 열 살 가까이 됐고, 남편도 베이징에서 목공으로 일하는 농민공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아들을 베이징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사는 것이 꿈이었다.

샤오왕은 가끔 하루이틀 휴가를 냈다. 다시 출근한 날에는 얼굴이나 팔등에 푸르뎅뎅한 멍 자국이 있었다. 남편이 평소엔 착한데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서 자기를 때린다고 했다. 농촌 남자는 대부분 그렇다며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또 때리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더니 샤오왕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넌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중국 경찰은 사소한 가정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고향 마을에선 여자가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집밥 먹는 일처럼’ 흔하다고 말했다. 중국에는 서양처럼 남편이 아내를 때리면 경찰이 와서 바로 남편을 잡아가는 ‘법’이 없기에 중국 남자, 특히 농촌 남자는 아내를 마음대로 때린다고 했다(중국 ‘가정폭력방지법’은 2016년에 생겼다).

어느 날 샤오왕이 일주일 휴가를 요청했다. “아이를 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사는 베이징 외곽 농민공 마을에는 일반 정규 병원의 절반 가격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낙태수술을 하는 무허가 시술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아이를 떼고’ 며칠 쉬다 오겠다고 했다. 내가 “무섭지 않냐”고 했더니, 샤오왕은 “벌써 세 번이나 그곳에서 낙태수술을 해봐서 괜찮다”며 “고향에서 가족계획생육위원회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강제로 낙태수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예전에 고향 마을에서 아이 둘을 낳고 또 불법으로 임신했다가 들켜서 임신 7개월째에 가족계획생육위원회 사람들 손에 끌려가 강제 낙태 시술을 받다 죽은 여자도 있다고 했다.

다섯 번이나 낙태한 샤오왕

샤오왕은 그 뒤로도 두 번 더 그 불법 시술소에서 낙태수술을 받았다. 마지막 다섯 번째 수술을 받은 뒤에는 출혈이 너무 심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룻바닥을 고쳐주기 위해 찾아온 샤오왕의 남편에게 내가 “피임하든지 아니면 정관수술을 하라”고 했더니, 그는 피식 웃으며 “그러면 남자가 힘이 없어진다”고 했다. 샤오왕도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남편을 따라 피식 웃었다. 다섯 번째 낙태수술의 후유증 탓인지 몸이 많이 약해진 샤오왕은 결국 “고향에 내려가 몇 달 쉬어야겠다”고 말하고는 휑하니 베이징을 떠나버렸다.

시어머니에게 들은 얘기에 따르면, 마오쩌둥 시절에는 아이를 3명 이상 낳으면 ‘영웅 엄마’라는 호칭을 들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인구가 국력’이라며 여자들에게 적극적인 ‘임신과 출산’을 격려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뒤인 1980년대 이후 정부는 말을 바꿔서 엄격한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했다. 가족계획생육위원회는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잉여인간’은 모조리 강제 낙태를 시켰다. 샤오왕의 다섯 번에 걸친 낙태는 사실상 국가가 여성의 몸을 강제 점령하고 통제한 결과였다. 중국 여성들은 하루아침에 영웅 엄마에서 불법 임산부가 됐다.

슈친은 이름 없는 지방의 전문대에서 회계를 전공했고, 같은 고향 마을에서 알고 지낸 남자와 결혼해서 그를 따라 베이징에 왔다. 슈친의 남편은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서 박사학위를 따고 나중에 교수까지 된 전도유망한 지식인이었다. 슈친은 베이징의 작은 중소기업에서 회계사를 했고 월급도 보잘것없었다. 박사인 남편에게 늘 지적 열등감이 있었고, 자주 뭔가에 주눅 들어 보였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가 눈치가 심상치 않다는 하소연도 했다. 남편이 교수가 되자 동료 아내들과도 같이 어울렸는데, 그럴수록 슈친의 열등감이 깊어져만 갔다.

어느 날 슈친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다. 상사에게 성희롱당한 사실을 사장에게 알리자, ‘시끄럽게 될까봐’ 회계장부상의 작은 문제를 트집 잡아 슈친을 해고했다. 슈친은 ‘박사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남편은 오히려 화내며 “내 체면까지 깎지 말라”고 충고했다.

한동안 슈친은 재취업을 못한 채 남편 수입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학수고대하는 아이도 생기지 않고 직장에서 해고까지 되자 이 부부는 싸움이 잦아졌다. 급기야 남편은 싸움 중에 그만 욱해서 “무식하고 못 배운 게 자랑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학벌은 곧 경쟁력인데 넌 앞으로도 계속 도태될 것”이라고 싸늘한 ‘경고’를 했다. 슈친은 이혼을 결심했다. 부부는 몇 달 뒤 모두의 앞에서 이혼을 선언한 뒤 헤어졌다. 슈친은 남편에게 위자료 명목으로 5만위안(당시 환율로 약 800만원)을 받고 고향에 내려가 한동안 부모 집에 칩거했다.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이 부부는 헤어진 지 2년 뒤 다시 결합했다. 남편이 미국 워싱턴으로 가게 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을 결정했다. 미국에 가자마자 포기했던 임신도 기적처럼 돼서 아이도 낳았다. 중간에 한 번 베이징으로 혼자 나온 슈친의 남편은 우리에게 내내 아내 자랑을 했다.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아내 자랑이었다.

슈친이 미국에서 화교 아이들에게 중국어 과외를 해서 상당한 돈을 벌고, 영어를 배우는 속도가 놀라울 수준이라고 했다. 이제는 자기보다 영어를 더 잘한다며 중국에 돌아와서는 영어 과외로 돈을 많이 벌 거 같다며 싱글벙글했다. 하지만 슈친은 아이와 미국에 남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보스턴대학에 입학해 심리학을 공부하고 대학원까지 들어갔다. 슈친은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 했다.

슈친은 혼자 중국에 돌아간 남편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중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원한다면 다시 이혼하자고 했다. 남편은 ‘기다리겠다’며 거절했다. 뒤늦게 아내의 ‘가치’를 알게 된 슈친의 남편은 오매불망 미국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다음 연재에 계속됩니다)

베이징(중국)= 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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