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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요람 칠레, 이젠 그 무덤 될 것”

35살 급진좌파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최연소 대통령 당선… 2022년 ‘제2의 건국’ 수준의 개헌안 국민투표 예정
등록 2021-12-25 13:34 수정 2021-12-26 03:36
2021년 12월19일 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좌파연합 후보가 역대 최연소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1년 12월19일 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좌파연합 후보가 역대 최연소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직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패기 넘치는 학생운동가 출신의 급진좌파 청년 정치인이 칠레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된 가브리엘 보리치(35)가 주인공이다. 2021년 12월19일(현지시각) 치른 대선 결선에서 보리치(사회융합당)는 56% 득표율로 극우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공화당)을 꺾고 당선했다.

페미니스트, 환경주의자, 학생운동 지도자

앞서 2021년 7월, 대선을 위해 뭉친 좌파 정당 9곳의 선거연합 ‘존엄성을 지지한다’의 단일후보 경선에서 보리치는 칠레 공산당 소속 다니엘 하두에를 제치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이어 11월21일 대통령과 상·하 의원, 지방의원까지 모두 뽑는 총선이 열렸다.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 당선자가 나오지 않은 1차 투표에서 보리치는 카스트에게 뒤진 2위였으나, 2차 결선에서는 카스트를 12%포인트 가까운 차이로 따돌리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었다. 강력한 맞수였던 카스트는 2001년 하원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내리 4선을 기록하고 2017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관록의 정치인이다. 아버지가 독일 나치 당원이었으며, 본인도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을 만큼 극우 보수 성향이 짙다.

보리치는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12월21일 저녁 환호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칠레의 모든 남성과 여성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국민 통합 메시지를 전했다고 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가 전했다. “어디서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변함없는 책무이며, 어떤 이유로든 자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또 “구조적인 변화를 위해 책임감 있게 나아갈 것”이라며, 개혁 공약의 실천 의지도 거듭 밝혔다. 보리치 대통령 당선자는 2022년 3월 취임과 함께 새 정부를 이끌게 된다.

이번 선거는 칠레 정치사에서 여러 기록을 경신했을 만큼 뜨거웠다. 12월19일 결선 투표율은 56%에 육박해, 2012년 의무투표제가 폐지된 이후 가장 높았다. 당선자와 2위의 표차도 1989년 칠레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에서 최고치를 기록했다. 보리치는 칠레 역사상 최연소이자, 페미니스트와 환경주의자를 자처하는 최초의 밀레니얼세대 대통령 당선자이다. 그는 또 1973년 군부 쿠데타로 무너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이후 반세기 만에 칠레에서 가장 좌파 성향이 강한 정치인이다. 보리치는 청소년 시절부터 카를 마르크스와 헤겔의 저작을 탐독했다고 한다.

보리치는 크로아티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이다. 칠레 남부 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푼타아레나스 학생연맹을 결성했을 만큼 조직력과 리더십이 뛰어났다.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칠레대학 법학과 재학 시절에는 표절과 부패 혐의로 기소된 교수를 학교에서 쫓아내기 위해 44일간 캠퍼스 연좌시위를 이끌었다. 25살이던 2011년에는 사립대학들이 이윤만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고 교육개혁을 요구한 대규모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이어 2013년 총선에서 27살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해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2017년 총선에서 재선에도 성공했다. 이어 좌파연합의 대선 후보로 전격 발탁된 뒤 단숨에 최연소 대통령 기록까지 세웠다.

향후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2022년 칠레에선 국가 개조에 버금갈 만큼 헌법을 바꾸는 제헌회의 헌법 초안 국민투표가 예정돼 있다. 보리치의 당선은 최근 2~3년 새 중남미 국가들에서 잇따라 좌파 정부가 집권하는 ‘핑크 타이드’(분홍 물결)를 재확인했을 뿐 아니라, 이후 예정된 주변국의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칠레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2022년 3월 출범할 보리치 정부는 칠레의 전면적 개혁을 추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대선 당일 저녁 보리치는 당선 감사 연설에서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매우 명확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대선 후보 경선 연설에서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젠 그 무덤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당선될 경우 국가 개조에 버금가는 사회시스템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했다. “젊은이들은 칠레를 변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했다. 이런 선언은 수사적 비유가 아니라 칠레의 굴곡진 현대사와 관련 있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이론적 토대를 닦은 신자유주의의 첫 실험장이 바로 칠레였다. 1973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가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출범한 사회주의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유혈 쿠데타로 전복했다.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의 경제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파 경제학자들을 권력의 중심에 끌어들였다.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에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결합한 것이다. 미국에서 양성돼 미국보다 더 철저하게 시장원리를 신봉하고 전파한 칠레 출신 프리드먼의 후예들에겐 ‘시카고 보이스’(The Chicago Boys)라는 별칭이 붙었다. 칠레에서 배양된 신자유주의는 곧장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가 주도한 세계적 뉴노멀로 퍼졌다. 바로 그 시기 칠레에선 피노체트의 철권통치(1973~1990)가 무너지기까지 공식 집계로만 최소 4천 명의 반정부 시민이 살해되거나 실종됐다.

칠레의 신자유주의 노선은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됐다. 외형적 경제성장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2010년에는 남미 국가로는 최초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로는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 됐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 삶의 질은 피폐해졌다. 최상위 1% 부자들이 전체 국부의 25%를 소유할 만큼 자산과 소득 불평등이 심각하다. 노동시간, 실업률, 양성평등, 언론자유 등 사회·경제적 발전과 인권을 가늠하는 많은 지표에서 칠레는 OECD 38개 회원국 중 최하위권을 맴돈다. 방임에 가까운 자유주의 시장원리가 불러온 극심한 경제 양극화와 공적 사회보장 시스템의 붕괴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2021년 12월19일 밤 칠레 대선 결선투표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좌파연합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자 지지자 수십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의 도심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1년 12월19일 밤 칠레 대선 결선투표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좌파연합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자 지지자 수십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의 도심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공공지출 확대, 부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2019년에는 칠레의 주요 도시에서 격렬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이후 30년 만에 수도 산티아고에 군병력이 배치되는 비상사태를 맞기도 했다. 정부가 유가 인상과 페소화 가치 하락을 이유로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을 30페소(약 50원) 올린 게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밑바닥에는 갈수록 커지는 소득 불평등과 누적된 생활고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이번 대선의 표심은 정치 신인 대통령과 급진좌파 정권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소수 특권동맹의 이익을 앞세우는 극우 정권 출현에 대한 거부감과 근본적 변화의 열망이 훨씬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리치는 대선 과정에서 공공지출 확대, 민영연금 폐지, 부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양성평등 내각 구성, 친환경 정책, 학생 부채 탕감, 원주민과 소수민족 권리 확대 같은 개혁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선 다음날인 12월20일, 보리치 당선자는 2019년 시위에 참여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된 시민들에 대한 기소를 철회할 뜻을 밝혔다. 보리치 선거캠프의 수장 조르조 잭슨 상원의원은 “시위를 벌이다 회복할 수 없는 신체적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부당하게 자유를 빼앗긴 시민들”을 언급하며 “한 나라가 어떻게 치유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고도 했다. 보리치 캠프에서는 취임 뒤 사면법을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리치 정부가 집권 첫해인 2022년에 당면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실상 제헌에 버금가는 헌법 개정 절차를 순조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2021년 12월22일 보리치 당선자는 제헌회의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칠레가 더 푸르고 공정한 국가로 거듭날 가능성은 독재정권 시절의 헌법을 다시 쓰려는 노력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고 말했다. 앞서 2021년 5월 칠레는 피노체트 독재 시절인 1980년에 만들어진 구체제 헌법을 ‘민중 헌법’으로 전면 개정하기 위한 제헌회의를 구성하고 15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보다 7개월 전인 2020년 10월 개헌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인 79%가 ‘찬성’했을 뿐 아니라, 새 헌법안도 기존 의회가 아니라 2019년 민중항쟁의 열망을 반영한 새로운 대표기구에서 작성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새 기구의 명칭은 반대쪽 여론을 의식해 제헌의회가 아닌 제헌회의(Convención Constitucional)로 명명됐다. 최연소 급진좌파 대통령을 탄생시킨 이번 대선은 사실상 ‘제2의 건국’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남미의 거센 ‘핑크 타이드’

칠레발 정치 혁명의 진앙이 중남미 대륙 전체의 정치 지형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관심거리다. 라틴아메리카에선 최근 몇 년 사이 ‘핑크 타이드’가 거세다. 201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나마, 도미니카, 볼리비아, 페루, 칠레, 온두라스, 니카라과 등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2022년 대선을 앞둔 브라질에서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이끄는 노동자당이 군인 출신 극우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을 제치고 재집권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관측된다.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은 칠레 대선 결과가 나오자 ‘보리치’ 이름이 새겨진 야구모자를 쓰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우리 라틴아메리카에서 또 한 명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후보가 승리해 기쁘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축하 메시지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불평등을 끝내기 위해 함께 일하자”며 기대감을 비쳤다. 페루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교사 출신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도 트위터에 “당신(보리치)의 승리는 자유, 평화, 정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축하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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