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러시아 경제제재 누가 오래 버틸까?

러시아 원유 수입금지 두고 미국-유럽 입장 엇갈려…세계경제에도 부담 지우는 ‘양날의 칼’
등록 2022-03-13 12:41 수정 2022-03-14 07:01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러시아에 국제사회가 고강도 경제제재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제재에 강하게 반발하며 역공에 나섰다. 신냉전 대결을 거칠게 열어젖힌 우크라이나 전쟁이 경제 전쟁으로도 번지는 모양새다. 세계경제는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주도하는 대러 경제제재는 러시아 정계와 군부 수뇌부, 대부호와 기업들에 대한 자산 압류 또는 동결, 제재 리스트 인물과 그 가족들의 비자 제한,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 금지, 러시아 기업에 대한 투자 금지, , 첨단 기술과 관련 제품의 러시아 수출 통제 등 등 전방위적이다.

러시아 재벌 자산 96조원, 허공으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는 2022년 3월13일부터 러시아 국책은행인 VTB 등 은행 7곳과 그 자회사들을 결제망에서 퇴출하기로 했다. 한국도 동참한다. 3월 초 유럽연합(EU)이 러시아 은행들을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차단한 조처를 세계 금융망 전체로 확대한 것이다. 스위프트는 세계 200여 개국 1만1천 개 은행을 연결하는 국제 통신망이다. 여기서 배제된 은행은 국제 금융시장 접근이 극도로 제한된다. 앞서 3월5일 글로벌 신용카드 회사인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가 잇따라 ‘러시아 영업 중단’을 선언했다.

서방의 대러 제재는 러시아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에도 초점을 맞췄다. 푸틴의 핵심 지지층인 올리가르히는 옛소련의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에서 천연자원 사업권을 독점하며 엄청난 부를 차지한 특권계층을 형성했다. 3월9일 유럽연합은 러시아 정부 관리와 올리가르히 등 100여 명을 제재 대상에 추가하고 가상화폐와 해운산업 분야에도 제재를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제재에 가상화폐가 포함된 것은 제재 대상이 블록체인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제재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다.

앞서 3월3일 미국 CNBC 방송은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를 인용해 최근 몇 주 동안 러시아 최상위 부자 20명이 국외 자산 압류와 금융 동결, 루블화 폭락으로 총자산의 3분의 1에 가까운 800억달러(약 96조6천억원)를 날렸다고 보도했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JP)모건은 앞으로 수개월 동안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이 11%가량 급감하면서 1998년 금융위기 때와 맞먹는 경기 후퇴를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그러잖아도 수년째 지속했던 저유가로 침체에 빠진 러시아 경제가 국제금융망 차단, 산업생산과 교역 위축, 저축 고갈, 루블화 폭락 등 악재가 겹치며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전망이다.

미화 대비 루블화 환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2월 첫째 주 1달러당 75루블에서 3월7일 기준 144루블로 치솟았다. 불과 한 달 만에 화폐가치가 거의 반토막이 났다. 급기야 러시아 중앙은행은 환율 방어를 위해 기준금리를 기존의 두 배가 넘는 20%로 올리고, 달러와 유로 등 외화보유고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3월9일에는 러시아 은행들이 루블화 외화 환전을 앞으로 6개월간 중단한다고 밝혔다.반대로 외화를 루블화로 환전하는 것은 한도를 없앴다.
미국은 러시아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전격 금지했다. 미국인의 러시아산 에너지 생산 투자도 금지됐다. 3월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연설에서 “미국인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지하기 위해 뭉쳤으며, 푸틴의 전쟁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해왔다”고 말했다. 러시아 지배계층을 겨냥한 맞춤형 제재이지만, 유가 인상 등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는 초강력 처방이다. 바이든은 “이런 조처는 푸틴에게 더 큰 고통을 주려는 것이지만, 자유를 수호하는 데는 미국에도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루블화 가치 반토막… 브렌트유 가격 급등

이날 글로벌 에너지 기업 셸은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구매를 중단하고 러시아 내 주유소 영업과 항공유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월 셸은 푸틴의 돈줄로 알려진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과의 합작투자를 철회했다. 영국계 글로벌 에너지기업 비피(BP)도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로스네프트 지분 전체(19.75%)를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전체 수출에서 원유와 천연가스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2021년 한 해에만 원유와 가스 수출로 약 9조1천억 루블(약 143조 원, 우크라이나 침공 전 환율)을 벌어들였다. 지난해 러시아 전체 예산(25조2900억 루블)의 36%가 에너지 수출에서 나온 셈이다. 

그러나 러시아산 원유 수출 제재를 두고는 미국과 유럽의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유럽은 러시아산 원유 금수에 회의적이다. 독일이 자국에서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약 50%를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등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러시아산 원유 금수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유엔 국제무역통계 데이터베이스(UN Comtrade)에 따르면, 2020년 러시아의 최대 원유 수출국은 중국(32.8%)이다. 네덜란드(13%), 독일(8.7%), 한국(6.9%), 폴란드(5.8%), 이탈리아(5.2%) 등이 뒤를 잇는다. 미국 수출 물량은 1.3%에 불과하다. 러시아 원유 수출의 3분의 1을 구매하는 중국은 러시아의 든든한 교역 파트너다.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가파르게 치솟으며, 1970년대 이후 반세기 만에 ‘오일쇼크’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2022년 1월 초 브렌트유는 배럴당 82달러 수준이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월24일) 이후 급등해, 3월6일에는 장중 한때 140달러에 근접하기도 했다. 불과 2주 만에 70% 넘게 폭등한 셈이다. 일부 전문가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가능성을 점친다. 미국의 독자적 원유 금수 조처의 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서방의 제재에 대한 러시아의 반격도 거세지고 있다. 3월9일 러시아 외교부의 드미트리 비리체프스키 경제협력국장은 “제재를 부과하는 자들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은 신속하고 신중하며 민감(한 분야를 겨냥)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관영 언론 <리아노보스티> 통신이 전했다. 러시아는 서방의 금융제재에 대응해, 자국이 노르드 스트림 1 가스관을 통해 유럽으로 공급되는 천연가스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3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3월7일 러시아 정부는 자국 기업과 국민에게 ‘비우호적 행동’을 한 나라와 지역의 목록을 발표했다고 관영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국가들에 대한 채무가 있는 정부 기관과 기업, 개인이 외채 상환을 할 경우 외화가 아니라 가치가 폭락한 러시아 루블화로 지불할 수 있도록 했다. 드미트리 페소코프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 명단은 최종적인 게 아니며, 변경될 수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제재에 참여한 국가들을 압박하고 제재 전선의 분열을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3월5일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이 자국에) 시행 중인 제재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날 푸틴은 우크라이나 지도부에 “만일 그들이 지금 하는 것(저항)을 계속한다면 그건 우크라이나 국가 지위(statehood)의 미래를 미궁에 빠뜨리며, 그 경우 그들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반발 속 국제 연대, 시험대 올라

서방은 앞으로도 한동안 러시아에 대한 제재 고삐를 더욱 바짝 조일 태세다. 지금으로선 무력 개입을 배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긴밀히 연결된 현실에서, 자원 부국이자 거대 시장인 러시아와의 교역 중단은 세계경제에도 부담을 지우는 양날의 칼이다. 러시아는 국내총생산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세계 11위(2021년)다.

 푸틴 집권 이후 20여년 동안 러시아 경제에서 미국, 유럽 등 서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반면 중국이 최대 교역국으로 급부상한 것도 서방의 제재 충격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독일 교역투자진흥처(GTAI)에 따르면, 러시아 교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2001년 2% 수준에서 2020년에는 23.7%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독일은 13.8%에서 10.1%로, 미국은 약 8%에서 5.7%로 완만한 감소세를 보였다.

 독일의 시장·소비자 데이터 기업 스타티스타(STATISTA)의 데이터 저널리스트 마틴 암스트롱은 “최근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의 대중국 무역 강화는 전쟁 발발시 서방의 제재로부터 취약성을 줄이려는 장기적 지정학 계획의 하나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2월5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주요국 정상으로는 드물게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새로운 투자·무역 협정을 포함한 경제협력 로드맵에도 합의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명백한 주권 침탈이며 국제법 위반이다.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포격과 살상은 ‘전쟁 범죄’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를 볼모로 잡은 푸틴의 ‘유라시아 제국’ 야망 앞에서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인도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연대의 시험대에 올랐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