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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떠난 뒤 흔들리는 영 연방

옛 식민지 시민 “엘리자베스 여왕 죽음, 잔혹한 유산 세탁하는 데 사용돼선 안 돼”
등록 2022-09-19 13:27 수정 2022-09-20 01:54
2022년 9월14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국왕 근위병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을 안치하기 위해 운구하는 것을 왕실 가족이 맞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2년 9월14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국왕 근위병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을 안치하기 위해 운구하는 것을 왕실 가족이 맞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렸던 영국의 석양빛이 한층 짙어졌다.

2022년 9월8일 오후(현지시각),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국왕이자 최장기 재위 기록을 세운 엘리자베스 2세(1926~2022)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 엘리자베스 여왕의 타계는 ‘대영제국’ 시대가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했음을 확인하는 상징이자, 문자 그대로 격동의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다. 영국은 지금도 경제 규모 세계 5위, 군사력 세계 8위의 강국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과 한 세기 전에 세계를 호령하던 패권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애 대부분은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고 일컬은 20세기를 관통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 70년 동안 모두 15명의 총리를 맞았다. 그가 생전에 국왕으로서 마지막으로 수행한 공식 일정은 9월6일 리즈 트러스 신임총리를 환한 표정으로 맞이하며 임명장을 수여한 일이었다. 불과 이틀 뒤 영국 왕실은 “여왕이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왕위는 곧바로 여왕의 장남 찰스 왕세자(73)에게 승계됐다. 9월10일 찰스 3세는 국왕으로 공식 즉위했지만 상징성과 구심력은 선왕에 미치지 못한다. 영국연방(코먼웰스·Commonwealth) 국가들 일부에선 공화국 전환과 연방 탈퇴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영국연방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뒤 영국과 정치적 결속을 이룬 56개국 그룹이다. 영국에서도 군주제 존폐를 둘러싼 격론이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2022년 9월14일 영국의 새 국왕 찰스 3세(앞줄 왼쪽)와 그의 동생 앤 공주(오른쪽), 윌리엄 왕세자(찰스 3세의 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런던 버킹엄궁에서 의회와 인접한 웨스트민스터사원으로 옮겨지는 행렬의 맨 앞에서 걷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9월14일 영국의 새 국왕 찰스 3세(앞줄 왼쪽)와 그의 동생 앤 공주(오른쪽), 윌리엄 왕세자(찰스 3세의 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런던 버킹엄궁에서 의회와 인접한 웨스트민스터사원으로 옮겨지는 행렬의 맨 앞에서 걷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여왕의 장례식

9월10일, 영국 왕실은 ‘유니콘 작전’으로 명명된 국가장례 절차를 개시했다. 다음날 여왕의 유해는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으로 옮겨졌다. 9월12일에는 에든버러 세인트자일스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열렸다. 9월13일 여왕의 유해는 런던 버킹엄궁으로 이동해 왕가 일족과 만난 뒤, 9월14일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안치됐다. 영국 왕실은 9월15일부터 19일까지 닷새간 일반인의 조문을 받는다. 영국에서 국가 지도자의 유해가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1965년 윈스턴 처칠 총리의 국장 이후 처음이다.

장례식은 9월19일 영국 국교회 대성당인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치러진다.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이날 장례식에는 세계 30여 개 나라에서 국왕, 대통령, 총리 등 정상급 지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장례예식이 끝나면 여왕의 관은 런던 외곽인 버크셔주 윈저성에 있는 세인트조지성당에서 마지막 예식을 치른 뒤, 2021년 4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필립공의 옆에서 영면에 든다.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추모하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잉글랜드 서부 항구도시 브리스틀의 대성당 앞에도 추모 꽃다발이 쌓였다. 시민 그레이엄 피셔는 <비비시>(BBC) 방송에 “여왕이 깊고도 슬프게 그리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의 여왕, 우리의 군주였다. 여왕은 최고의 우아함과 동정심과 인간미로 우리를 이끌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주민 파트리샤 페르난데스(39)도 “사람들은 영국을 생각하면 저절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떠올린다. 여왕의 삶은 정말로 놀랍다. 타계는 정말 슬픈 소식이다”라고 말했다.

2022년 9월14일 영국 글래스고에 있는 축구경기장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 두 팀이 UEFA 챔피언스리그 A조 경기를 앞두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타계를 추모하는 묵념 의식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2년 9월14일 영국 글래스고에 있는 축구경기장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 두 팀이 UEFA 챔피언스리그 A조 경기를 앞두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타계를 추모하는 묵념 의식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복잡한 감정, 엇갈리는 평가

영국인 대다수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호감과 친근감, 자부심을 표현한다. 2022년 5월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자국민에게 “여왕이 재위 기간 중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0명 중 8명이 긍정적 답변(“매우 그렇다” 58%, “꽤 그렇다” 24%)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지지가 군주제와 영국의 제국주의 흑역사를 정당화하는 건 아니다.

1952년, 25살의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는 식민지 케냐를 방문하던 중 부왕 조지 6세의 급서 소식에 귀국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바로 그해 케냐에선 영국 식민통치에 맞선 무장투쟁(마우마우 봉기)이 시작됐다. 1960년까지 지속된 충돌에서 진압에 동원된 케냐 군경을 포함해 약 1만5천 명이 목숨을 잃고, 100만 명이 집단수용소에서 끔찍한 인권유린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2013년에야 공개사과하고 피해자 5천여 명에게 금전적 배상을 했다. 9월12일 케냐 시민 키콘드 음밤브리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이 (그의) 잔혹한 유산을 세탁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밴더빌트대학의 아프리카 연구자 모지스 오초누 교수는 미국 공영 라디오 <엠피아르>(NPR)에 “엘리자베스 2세 재위 기간 중 옛 식민지에서 20개 넘는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식민주의의 표상이자 탈식민화의 상징이라는 두 면모를 지녔다”고 말했다. 영국의 옛 식민지들에서 여왕이 기억되는 방식이다.

이런 분위기는 영국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에서도 일반적이다. 바하마의 한 종교지도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공공연히 애도하는 이들은 영국 출신 이주자와 정치인, 노장년층이며 젊은 세대 대다수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온라인 매체 <인디펜던트>에 “영국의 식민통치와 싸우고 독립을 로비했던 바로 그 세대가 엘리자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우습다. 1973년 독립 이후 출생한 세대는 애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위 7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린 2022년 6월5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즉위 7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린 2022년 6월5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군주제 논란 재점화

영국의 정식 국호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다. 오늘날 영국의 주축이 된 잉글랜드를 비롯해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4개의 ‘홈네이션’으로 구성된다. 현재 영국 국왕의 법적 지위는 ‘영국연방의 수반’이자 ‘영국 국교회의 수호자’이다. 영국연방 국가들의 정부는 ‘국왕의 정부’다. 그러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원칙에 따라 국왕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관례로 군주는 투표하지 않으며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는다.

영국에서 국왕과 의회의 관계는 ‘의회에서의 왕’이라는 공식 문구로 표현된다. 국왕의 권한과 임무에는 총리 임명, 상원과 하원의 새 회기 개원, 주요 입법의 승인, 추밀원을 통한 정부 명령과 선언의 승인, 정기적인 총리 접견 등이 포함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타계로 영국에선 군주제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을 전망이다. 공화제 전환 운동 시민단체인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대표는 <로이터> 통신에 “여왕 사망 이후 군주제의 미래는 심각한 위기에 놓였다. 찰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누린 존경심까지 물려받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영국인 다수가 군주제를 선호한다. 영국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의 앞 여론조사에서, “군주제가 지속해야 한다”(62%)는 의견이 “지도자 선출제로 바뀌어야 한다”(22%)는 의견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군주제 지지론은 미세하게나마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공화제 지지자가 많아진다. 영국은 성문헌법이 없는 까닭에 군주제 폐지의 법적·제도적 수단과 절차가 불분명하다. 다만 군주제 폐지 여론이 압도적으로 커진다면 왕실이 존속하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영국의 홈네이션인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분리독립 기류가 더 거세진 분위기도 변수다.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와 앙숙이던 스코틀랜드의 자치정부는 2023년 10월에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예고해 영국 중앙정부와 부딪치고 있다.

영국연방의 미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시대는 저물었다. 옛 식민지들이 잇따라 독립하면서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권위와 영향력까지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1952년만 해도 세계 인구 4분의 1이 넘는 7억 명 이상에 영국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금도 영국을 중심으로 56개국이 영국연방을 구성하며, 그중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자메이카 등 14개국은 영국 왕이 공식적인 국가원수인 ‘영연방왕국’(Commonwealth realm)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없는 영국연방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회원국들의 도미노 탈퇴까진 아니라도 결속력이 훨씬 더 느슨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영연방 탈퇴는 군주제 폐지와 공화제 전환과 맞물려 있다. 영국과 회원국들의 관심사와 정책 순위의 불일치, 영연방국가로서 누리는 실익이 없는 점 등도 구심력을 낮춘다. 이런 움직임은 백인 중심 국가들보다 카리브해의 여러 나라에서 도드라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노동당)는 2022년 5월 집권한 직후 공화제 전환 담당 장관을 임명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타계 뒤 “내 임기 중에는 국민투표를 하지 않겠다”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노동당)도 “역사의 한 장이 닫혔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자신의 정부에서 공화제 전환을 추진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카리브해의 영연방국가들에선 공화제 전환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바베이도스는 2021년 10월 영국 왕이 아닌 선출직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지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394년 만에 영국 왕실과 결별했다. 11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이 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 출신 샌드라 메이슨(73)이 당선했다. 이어 2022년 1월 총선에선 좌파 노동당이 하원 30석 전석을 휩쓸며 공화국 전환의 실행에 들어갔다. 메이슨 대통령의 당선 전 신분은 영국 여왕의 대리 통치자인 ‘총독’이었다.

자메이카도 공화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2022년 3월, 앤드루 홀니스 총리는 자국을 국빈 방문한 영국의 윌리엄 왕자 부부에게 대놓고 독립 의사를 밝혔다. 같은 시기, 수도 킹스턴의 영국대사관 앞에선 영국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최소 22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카리브해 식민지 곳곳에 노예로 끌고 온 것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81년 독립한 앤티가바부다도 2025년 이전에 공화제 전환 국민투표를 할 계획이다. 인구 8만 명의 작은 섬나라인 이 나라는 아름다운 경관과 영국풍 문화로 ‘왕관의 보석’ ‘리틀 잉글랜드’로 불린다.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이것이 군주제에 대한 비존중이나 적대감은 아니다. 진정한 주권국이 되는 독립의 최종 단계”라고 말했다. 앞서 1970년대에도 도미니카, 가이아나, 트리니다드토바고 등 상당수 나라가 영연방왕국을 탈퇴했다. 바베이도스의 미아 모틀리 총리는 “우리의 식민지 과거를 완전히 뒤로할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포스트 엘리자베스 2세’ 시대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역대 최장기록인 64년 만에 ‘왕세자’ 칭호를 떼고 연합왕국과 영국연방의 새 왕관을 쓴 찰스 3세의 앞날이 장밋빛이 아닌 건 분명하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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