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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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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푸틴의 전쟁은 계속된다, ‘러시아의 봄’ 올 때까지

5선 확정 직후 ‘제3차 세계대전’ 거론하며 “핵전쟁 치를 준비 돼 있다”
등록 2024-03-22 11:15 수정 2024-03-23 13:56
5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4년 3월17일 밤(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손을 들어 보이며 퇴장하고 있다. REUTERS

5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4년 3월17일 밤(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손을 들어 보이며 퇴장하고 있다. REUTERS


예상대로 그는 압도적 지지율(약 87%)로 무난히 5선에 성공했다. 첫 두 번의 임기는 각 4년씩, 나머지 두 번의 임기는 각 6년씩이다. 중간에 ‘섭정’한 기간까지 이미 24년을 집권했다. 다시 6년의 임기를 확보했으니, 현대 러시아(옛 소련 포함) 역사에서 그보다 오래 집권한 최고지도자는 이오시프 스탈린(30년6개월)뿐이다. 그는 2030년 대선에서 6선에 도전할 수 있다. 승리한다면 제정러시아 시대인 18세기 중엽 집권한 예카테리나 2세(34년4개월)의 재위 기간을 넘어서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대통령’보다 ‘차르’(제정러시아 때 황제 칭호)에 가깝다. 러시아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2030년 대선 때 6선 도전도 가능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은 1952년 10월7일 옛 소련 제2대 도시인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스피리돈 푸틴은 191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문을 연 5성급 호텔 아스토리아의 요리사 출신이다. 제정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영적 스승’을 자처한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이 호텔에 들렀다가, 그의 요리를 먹은 뒤 감동해 금화를 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17년 러시아혁명 뒤 모스크바행을 택한 푸틴 대통령의 조부는 최고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과 스탈린의 개인 요리사로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푸틴 대통령의 부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와 맞서 싸우다 심한 부상으로 장애를 입어 경비일을 했고,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였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실)이 누리집에 올린 ‘전기’에서 푸틴 대통령은 스스로를 “그 시절 모두가 그랬던, 아주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고 말했다. 모친의 반대에도 청소년 시절부터 유도 등 격투기를 좋아했던 그는 일찌감치 직업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 누리집 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원이나 조종사가 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 전에 정보요원이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국가보안위원회(KGB) 지역 사무소를 찾아갔다. 정보요원이 되기 위해선 군복무를 하거나 법대에 진학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입시 준비에 몰두했다.”

1970년 레닌그라드대학 법학과에 입학한 푸틴 대통령은 공산당에 입당하는 한편, 나중에 그를 정치권에 입문시키는 아나톨리 솝차크 교수와 친분을 쌓게 된다. 1975년 졸업과 함께 KGB 요원으로 선발된 그는 레닌그라드에서 근무하다, 1984년 9월 모스크바로 옮겨가 국외요원 훈련을 받는다. 그는 1985년 독일(옛 동독) 드레스덴으로 파견됐다. 공식 신분은 ‘통역사’였지만,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와 KGB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동독 공산당은 급속히 통제력을 잃어갔다. 같은 해 12월5일 드레스덴의 슈타지 건물로 몰려든 시위대 중 일부가 길 건너 KGB 지역 사무소로 들이닥쳤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들어가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KGB 지휘관 한 명이 뛰쳐나와 시위대에게 외쳤다. “건물 안으로 진입하지 마라. 내 동지들은 무장했고, 비상 상황에서 발포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시위대는 곧 물러갔다.

“문제의 KGB 지휘관은 상황이 여전히 위태롭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동독 주둔) 소련군 기갑부대 쪽에 전화해 시설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답변은 인생을 바꿀 만큼 충격적이었다. ‘모스크바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스크바는 지금 침묵 중’이란 얘기였다. ‘모스크바는 지금 침묵 중’이란 말은 이후 그 KGB 지휘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999년 12월31일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전격 사임 의사를 밝힌 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REUTERS

1999년 12월31일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전격 사임 의사를 밝힌 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REUTERS


드레스덴에서 마주한 베를린장벽 붕괴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2015년 3월27일 공개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짚었다. 해당 지휘관은 당시 KGB ‘중령’으로 진급한 푸틴 대통령이고, 다큐멘터리 제목은 <푸틴을 만든 순간>이다. <비비시>는 전문가의 말을 따 “푸틴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장면이다. 그가 동독에서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푸틴, 다른 러시아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방송은 “드레스덴에서 마주한 베를린장벽 붕괴는 푸틴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줬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 엘리트의 취약성을 목격했고, 인민이 그들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똑같은 상황이 곧 러시아에서도 벌어졌다.

푸틴 대통령은 1991년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했다. 신규 요원 모집 업무를 맡았던 그는, 시장으로 당선된 대학 은사 솝차크의 국제관계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곧 KGB를 사직했다. ‘정치인 푸틴’의 서막이었다. 그는 1995년 창당한 친정부 성향의 ‘우리집 러시아당’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창설을 주도하고 지부장까지 지냈다. 우크라이나 전장을 주름잡던 용병업체 ‘바그너 그룹’의 창설자이자 ‘푸틴의 요리사’로 불린 예브게니 프리고진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군당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 방식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2023년 8월23일 의문의 항공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1996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재선에 나선 솝차크가 낙선했다. 선거를 지휘했던 푸틴은 시장 보좌진에서 물러났고, 모스크바로 근거지를 옮겼다. 국유재산 불하 등을 통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올리가르히’(신흥재벌) 세력이 한창 형성되던 때였다. 그는 국유재산 관리부 부책임자가 됐다. 어느새 그를 눈여겨본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의 발탁으로 이듬해 3월 대통령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98년 7월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 국장과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옐친 대통령은 1999년 8월 그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후계 구도’를 명확히 했다.

엘친이 발탁한 후계자

부패와 무능, 알코올중독 등 개인사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옐친 대통령은 1999년 12월31일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 누리집 전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해를 2~3주 앞둔 때였다. 옐친 대통령이 사무실로 나를 부르더니, ‘사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내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는 뜻이다.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운명이 내게 조국을 위해 최고위직에서 일할 기회를 줬다. ‘싫다’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예정보다 석 달 앞선 2000년 3월 치른 대선에서 그는 옐친 대통령의 정적이던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대표(29.44%)를 약 14%포인트 앞서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새 권력자와 올리가르히 세력 간 대타협이 이뤄졌다. 기득권 보장과 무조건적 지지가 맞교환됐다. 2002년 10월 체첸반군 세력이 모스크바의 두브롭카 오페라 극장을 급습했다. ‘러시아판 9·11’이라 부를 만하다. 인질 850여 명을 붙잡은 이들은 체첸에서 러시아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수많은 인질의 목숨이 위태로웠음에도 푸틴 대통령은 나흘 만에 전면 진압 작전을 명했다. 체첸반군 40여 명과 인질 1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 서구 언론은 이 사건으로 푸틴 정권이 흔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니었다. 옛 소련 시절의 ‘강하고 단호한 조국’을 다시 마주한 러시아인들은 열광했다.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83%까지 치솟았다. 그는 이듬해 3월 체첸에서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 소련 해체 뒤 분리·독립했던 체첸을 다시 러시아의 자치공화국으로 합병했다. 크림반도(2014년)와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2022년) 합병 때 활용한 방식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푸틴에 반대하는 정오.’ 러시아 대선 마지막 날인 2024년 3월17일 낮 12시께 수도 모스크바의 투표소 앞에서 갑자기 불어난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REUTERS

‘푸틴에 반대하는 정오.’ 러시아 대선 마지막 날인 2024년 3월17일 낮 12시께 수도 모스크바의 투표소 앞에서 갑자기 불어난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REUTERS


2000년 대선 때 약 53%를 득표했던 푸틴 대통령은 2004년 대선에서 지지율을 약 72%까지 끌어올리며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직을 ‘임기 4년, 재선’으로 제한했다. 2008년 대선은 출마가 불가능한 그는 ‘편법’을 동원했다. 푸틴 대통령의 총리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타’로 대선에 나서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정부의 총리로서 4년간 ‘집권’을 연장했다. 그는 헌법을 바꿔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치른 2012년과 2018년 대선에서 거푸 당선되며 4선에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마지막 임기’여서 푸틴 대통령이 후계 구도를 마련할 것이란 전망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020년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해 6년 임기 대통령에 두 차례 더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꿨다. ‘종신 집권’을 선언한 셈이다.

2024년 3월15~17일 러시아 대선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푸틴의 5선’이 아니었다. 그의 당선에 반대하는 표심이 낮은 투표율로 나타날지와 수감 중 의문사한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생의 막바지에 지지자들에게 호소한 ‘푸틴에 반대하는 정오’ 행동의 성사 여부였다. 관영 <타스> 통신은 3월18일 이번 대선에 유권자 8711만여 명이 참여해 사상 최고의 투표율(77.44%)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전까지 가장 높은 투표율은 소비에트 붕괴 직후인 1991년 치른 첫 대선 때 기록한 74.66%였다. 투표 마지막 날인 3월17일 정오, 러시아 전역의 주요 도시 투표장에서 갑자기 불어난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모습이 목격되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사상 최고 투표율 77.44%로 1991년 기록 넘어

5선이 확정된 직후 기자회견에 나선 푸틴 대통령은 ‘제3차 세계대전’을 거론하며 “핵전쟁을 치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3월18일 밤엔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크림반도 합병 1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크림반도의 충직한 주민들이 조국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기에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돈바스와 노보로시야 주민들도 ‘러시아의 봄’ 시절을 함께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노보로시야’(새 러시아)는 오스만제국을 물리친 예카테리나 2세가 1783년 합병한 크림반도를 비롯해 2022년 2월 말부터 전쟁이 불을 뿜고 있는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 등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 일대를 일컫는다. ‘러시아의 봄’이 올 때까지 ‘푸틴의 전쟁’은 계속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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