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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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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저녁이 있는 삶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출퇴근 시달리는 삶 피해 제주도 내려간 지
10년… 아내와의 대화가 깊어지고 아이를 갖고
등록 2014-11-22 06:41 수정 2020-05-02 19:27

“단점은 없나요?”
“글쎄요, 친구 관계가 끊기는 거….”
11월12일 오후 제주 첨단과학기술단지 안 다음카카오의 본사 ‘스페이스닷원’에서 만난 김영채(45)씨는 제주 생활의 장점을 속사포처럼 말하다 잠시 생각을 했다. 제주 생활의 단점을 말하는 게 장점을 말하는 것보다 100배는 어려워 보였다. “서울에 있는 주류 사회에 끼기 힘들다는 것은 있죠. 그래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곳이 이곳이에요.”

“처음엔 퇴근하고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다음카카오)이 제주에 자리를 잡은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다음은 2004년 제주 이전 작업을 시작했고 2012년 본사도 제주로 옮겼다. 당시 다음의 최고경영자였던 이재웅씨는 ‘직원들이 출퇴근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보다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제주에 터를 마련했다. 그 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겪으면서, 기업의 ‘색다른 생각’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었을까.
“제주로 오기 전 와이프와의 대화는 ‘저질’이었어요.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밤 10시, 치킨이라도 시켜 먹으면 12시에 잠자리에 들죠. 퇴근길에 파김치가 돼서 돌아오니 한다는 이야기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 말해주는 것뿐이었죠.”

다음카카오 직원 김영채씨가 지난 11월12일 제주 본사 건물의 돌하르방 앞에 섰다(왼쪽). 김원영씨는 다음카카오 제주 스페이스닷원 건물에서 퇴근한 지 2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다음카카오 직원 김영채씨가 지난 11월12일 제주 본사 건물의 돌하르방 앞에 섰다(왼쪽). 김원영씨는 다음카카오 제주 스페이스닷원 건물에서 퇴근한 지 20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김영채씨는 제주로 내려온 다음의 초창기 사람이다. 2005년 8월 아무 연고도 없던 제주로 물 건너왔다. 올해로 제주 생활만 10년째다. “이제 아내와 대화를 2시간 이상 해요. 주제도 다양하죠. 회사 이야기도 하지만 사회 이야기, 주변 이야기도 해요.”

그는 10여 년 전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경기도 수지, 서울 창동에서 강남까지 출퇴근을 하며 살았다. “열심히 일했죠. 12시간을 일한다면 아침 7시에 나와 8시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8시에 집에 가면 밤 10시였죠. 삶은 피폐해졌죠.”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4년 김씨의 삶은 다르다. 그는 새벽 5시55분에 일어나 6시20분에 영어학원에 도착한다. 7시30분에 집에 돌아와 아이와 함께 출근 준비를 하고 8시5분에 출근한다. 회사에는 8시20분에 도착해 아이를 회사 어린이집에 맡긴다. 8시30분에 업무를 시작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저녁 7시 정도다. 회식을 해도 집엔 밤 10시 전에 도착한다. 회사와 집과 회식 장소가 모두 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퇴근 뒤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웃음)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지역사회의 활동에도 녹아들게 되니 제 삶의 기준이 바뀌었어요. 저와 가족만 보고 살다가, 사회도 보고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39살에 아이를 낳았죠.”


“처음에는 퇴근 뒤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웃음)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지역사회의 활동에도 녹아들게 되니 제 삶의 기준이 바뀌었어요. 저와 가족만 보고 살다가, 사회도 보고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39살에 아이를 낳았죠.” -다음카카오 직원 김영채씨


사옥 내 카페에서 얘기를 나누다 김씨와 함께 ‘스페이스닷원’ 건물을 둘러봤다. 제주 중산간에 자리잡아 뒤로는 한라산, 앞으로는 남해가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450여 명의 직원이 일한다. 건물 옆에는 마치 ‘제주 오름’처럼 만든 어린이집도 있다. “출퇴근하면서 시달리지도 않지, 주변 풍광이 좋으니 직원들의 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요.” 김씨에게선 10년 동안 개척한 곳에 대한 자부심이 보였다.

통근버스 안에서 자는 사람 거의 없어

그는 ‘다음이 제주로 옮긴 뒤 포털 경쟁에서 네이버에 뒤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정색했다. “제주도로 옮긴 뒤 내놓았던 서비스 가운데 잘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얘기를 잘 안 해요. 이제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줄여 남는 시간과 열정을 창의적으로 수용하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10년은 정착과 복지가 이슈였고, 앞으로는 회사를 이끌어갈 발판을 마련하겠죠.” 웹에서 모바일로 넘어간 정보기술(IT) 업체들의 격변 속에서 올해 다음은 카카오와 합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스페이스닷원 주변은 썰렁해 더 컴컴했다. 퇴근 준비를 하고 나온 김원영(31)씨를 만났다. 다음카카오에서 개발 관련 일을 하는 그는 앞서 인터뷰한 김씨와 달리 제주에 내려온 지 1년6개월 정도 됐다. 제주에 왔다가 지역에서 일하는 것에 적응을 못하는 직원은 보통 2~3년밖에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저요? 가능하면 제주에 계속 있고 싶어요.”

그는 제주로 내려오기 전 전형적인 서울의 장거리 출퇴근자였다. 서울 개포동 집에서 한남동 회사까지 통근을 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역에 가서 지하철로 갈아탄 뒤 마지막에는 버스까지 환승해야 회사에 도착했다. 집을 나선 뒤 1시간20~30분이 걸려야 일터에 도착했다. 통근길 친구는 스마트폰이었다.

2014년 김씨의 삶은 달라졌다. 제주시 노형동에 사는 그는 자가용을 몰고 나오면 15분 만에 회사에 도착한다. 가끔은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통근한다. 일부러 산악 지형을 타면 1시간10분 정도 땀을 뺄 수 있다. 회사 통근버스를 탈 때는 회사까지 25~30분이 걸린다.

“통근버스를 타고 오다가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창밖 사진을 찍었어요. 서울에서는 출퇴근하면서 풍경 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여기서는 하늘을 가끔 봐요. 버스 안에선 동료들이랑 얘기를 하고요. 일 얘기도 하고 주말에 뭐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그는 통근버스 안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IT 회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원끼리 우연히 마주치도록 건물 구조도 바꾼다. 제주에선 직원들이 통근버스에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제주에 와서 아직은 특별히 아이디어가 생각난 건 없어요”라며 웃었다. 옆에 있던 다음카카오 직원 한동헌씨는 “스페이스닷원으로 온 뒤 직원들 만족도 조사를 하면 90% 이상이 만족한다고 나와요”라고 대신 거들었다. 직원의 만족도와 일에 대한 몰입도는 상관관계가 있다. 김원영씨는 “일을 더 집중해서 하긴 해요. 서울에선 퇴근 시간에 밀릴 것을 생각하면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여기는 퇴근하면 집에 금방 가니까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일을 끝내려 하죠. 야근을 만들지 않으려는 거예요”라고 했다.

퇴근 뒤 20분 만에 안은 아이

그와 함께 퇴근시간인 저녁 7시께 회사 문을 나섰다. 차를 타고 중산간에서 해안 쪽에 가까운 아파트 앞까지 내려오는 데 15분 정도 걸렸다. 김원영씨의 아내인 안나용(28)씨가 곧 돌이 될 아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 부부는 지난해 제주도로 터전을 바꾼 뒤 아이를 낳았다. 아내 안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실은 도시에서 복잡하게 사는 게 좋아서 제주에 오는 것을 망설였어요. 막상 와보니 신랑이 출퇴근 고생도 안 하고 서울에서보다 훨씬 빨리 집에 돌아와서 애 보는 것을 많이 도와주니 제주 생활이 만족스러워요.” 퇴근 뒤 20분 만에 김씨는 아이를 안았다.

제주=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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