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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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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식용유 세트, 차별은 정당한가

‘법의 눈’으로 살펴본 드라마 <미생> 속

직장 내 괴롭힘, 불리한 처우 등 여러 ‘억울한 일들’
등록 2014-12-13 06:27 수정 2020-05-02 19:27

작은 회사 사무직으로 일하는 한 친구는 바빠서 드라마 볼 시간도 없다는 푸념을 달고 살았다. 함께 만나면 다른 친구들이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막말 기본, 책임 전가가 특기인 상사와 진상 고객들과의 일화로 좌중을 웃겼다. 그런 그도 최근 드라마 을 보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자리는 을 계기로 거의 모든 화제가 직장에서 당한 억울한 일, 워킹맘의 비애 등으로 채워졌다. 이 시대 대부분의 직장인이 모두 ‘미생’인 탓일까. 에서 일어나는 여러 ‘억울한 일들’을 법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안영이가 마주한 ‘폭력의 새로운 얼굴’
원작과 달리 드라마 속 안영이는 부서 내에서 지독한 왕따를 겪고 있다. 안영이가 속한 자원팀의 마 부장과 과장, 두 명의 대리 등은 똘똘 뭉쳐 신입 여사원 안영이를 괴롭힌다. 장백기·한석률 등 다른 동기들도 각자 소속팀에서 사수와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안영이의 경우는 적대, 무시, 부당한 업무 지시 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98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직장 내 집단 괴롭힘(mobbing, bullying)을 ‘폭력의 새로운 얼굴’로 명명했고, 프랑스·스웨덴·핀란드·캐나다·일본 등에서는 관련 내용이 활발히 연구되고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직장 내 왕따로 인한 자살과 산재, KT 인력퇴출 프로그램 사례 등이 논의되었을 뿐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는 상태다. 여러 사람이 가하는 의도적·반복적·지속적인 적대, 전횡, 차별은 피해 근로자로 하여금 인격권의 침해는 물론 근로조건 악화로 인해 결국 직장에서 이탈하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현행법에서는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상 노사협의회 협의사항(제20조 3호, 4호)에 포함될 수 있지만 실효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안영이 사례와 같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는 법적 규율이 시급한 상황이다.

(왼쪽 위아래)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 오 과장, 김대리는 영업3팀의 일원이다. 김 대리와 오 과장은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충실한 직장 선배이자 멘토지만 그들 사이에는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건널수 없는 ‘차별의 강’이 존재한다. (오른쪽 위아래) 남성으로만 구성된 자원팀 부장·대리 등 선배들은 팀에 새로 합류한 유능한 신입 여사원 안영이를 의도적·반복적·지속적으로 괴롭힌다. tvN 제공

(왼쪽 위아래)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 오 과장, 김대리는 영업3팀의 일원이다. 김 대리와 오 과장은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충실한 직장 선배이자 멘토지만 그들 사이에는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건널수 없는 ‘차별의 강’이 존재한다. (오른쪽 위아래) 남성으로만 구성된 자원팀 부장·대리 등 선배들은 팀에 새로 합류한 유능한 신입 여사원 안영이를 의도적·반복적·지속적으로 괴롭힌다. tvN 제공

직장 내 괴롭힘보다 더 흔하게 마주하는 상황은 직장 내 성희롱이다. 드라마에서는 자원팀 마 부장이 주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여자가 어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성희롱으로 한 차례 징계를 받은 적도 있다. 셋째를 임신한 여직원에게는 “의리가 없다”고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해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남녀고용평등법 제2조 2호). 판례에 따르면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나 평가(“잘 빠졌다” “실하다”), 남녀관계를 암시하며 “분 냄새 흘리고 다닌다” “이상한 소문 나지 않게 몸가짐 조심하라” 같은 발언은 직장 내 성희롱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애를 셋이나 낳다니 여자는 의리가 없어” “이래서 여자는 믿을 수 없어” 같은 발언은 여성의 업무 수행 능력을 폄하하는 발언에 가깝고 성적 의미는 아니라고 하여 직장 내 성희롱으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젠더(gender)에 기반한 성희롱 역시 여성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적대적 고용환경을 유발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직장 내 성희롱의 범주를 확대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는 행위들, 예컨대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비하 발언, 차 심부름, 복사나 청소 등의 전담, 복장(하이힐)에 대한 지적 등도 업무 환경을 저해하는 행위임은 분명하므로 좀더 적극적인 해석이 요청된다.

사내 게시판에 비방글 올리면 명예훼손일까

사내 전자게시판에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게시하는 경우는 어떨까. 한석률은 궂은일은 자신에게 떠넘기고 결과만 가로채는 얍삽한 선배와의 대결에서 번번이 패하자 그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로 결심하고 사내 전자게시판에 그의 실체를 폭로하는 비방글을 올린다. 물론 상사의 부당한 대우로 인한 고충 등을 게시판에서 토로하고 공론의 장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한석률의 경우는 비방의 목적임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명예훼손은 사실 적시에 의해서도 성립할 수 있으므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 1항의 범죄에 해당할 수 있는 사안이다. 다만 이 범죄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는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인데다, 이후 한석률이 자기 꾀에 넘어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면서 개념 없는 신입으로 욕만 잔뜩 먹고 마무리가 되었다. 대법원은 사내 전자게시판에 게시된 글에 의해 타인의 인격 등이 훼손되고 기재된 사실관계 일부에 허위 등이 있더라도, 그 목적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등을 위한 것으로서 문서 내용이 전체적으로 보아 진실인 경우, 문서 게시 행위가 근로자의 정당한 활동 범위에 속한다고 판시한 예가 있으므로 참조가 될 것이다.

고졸 학력의 낙하산 인턴 장그래는 계약직 신입사원으로 1년을 버텨낸다. 동기들과 함께 교육 연수도 받고 일도 했지만 새해의 연봉계약서, 부서장 평가는 계약직 장그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설 선물로 정규직에게는 햄 세트, 계약직에게는 식용유 세트가 지급됐다. 식용유 세트를 바라보는 장그래의 표정이 먹먹했다. 이러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정당한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기간제 근로자임을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제8조), 차별적 처우를 임금, 그 밖의 근로조건 및 복리후생 등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불리하게 처우하는 것(제2조 3호)으로 정의한다. 대법원은 여기서 ‘불리한 처우’란 사용자가 임금 등에서 기간제 근로자와 비교 대상 근로자를 다르게 처우해 기간제 근로자에게 발생하는 불이익 전반을 의미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경우’란 기간제 근로자를 달리 처우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달리 처우할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그 방법·정도 등이 적정하지 않은 경우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계약직 직원들에게 중식비와 교통비를 차등 지급한 것은 불리한 처우이며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햄 세트와 식용유 세트의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 설 선물을 구별해서 지급하는 자체로 불이익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의 독백이 전하는 많은 위로

스스로 늘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왜 못돼먹은 상사는 어디에나 있고 항상 나보다 위에 있는지를 토로하면서 수다는 끝났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망하는 태도도,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책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엔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떨쳐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때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고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많은 위로를 준다.

고윤덕 변호사·법무법인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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