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니처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좀 패션지스럽게 허세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한겨레가 좋아하는 순수 한국말 표현으로 바꿔보자. 뭐가 있을까? 시그니처(Signature)를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찾았더니 ‘서명’ 혹은 ‘특징’이라고 해석해준다. 그렇다면 시그니처 스타일은 ‘서명 맵시’? 아니면 ‘특징 폼’? 그도 아니면 ‘특징적인 맵시’?
곤란하다. 그냥 시그니처 스타일은 시그니처 스타일이라고 하자. 나 역시 강경 한글 전용 정책 세대여서 외래어와 한자어를 멸종시키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어떤 단어는 그냥 외래어와 한자어로 있을 때 맛이 사는 법이다. 지금 한겨레에 칼럼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단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긴 하다만, 어쨌든 시그니처 스타일은 시그니처 스타일이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세이 미야케의 터틀넥과 르노의 은테 안경만을 고집했던 스티브 잡스의 스타일이 바로 시그니처 스타일이었다. 평생 한 가지 종류의 슈트만을 입었다는 아인슈타인의 스타일 역시 시그니처 스타일이다. 어떤 특정 스타일을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바로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이라는 소리다. 당신도 시그니처 스타일을 갖기 위해 옷장을 같은 옷으로만 가득 채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그니처 스타일은 단 한 가지 아이템으로도 만들 수 있다.
샹송의 음유시인 세르주 갱스부르는 죽는 날까지 거의 한 종류의 구두만 신었다. 프랑스 회사 레페토에서 생산한 하얀색 슈즈 지지(ZIZI)였다. 그가 레페토의 지지를 신게 된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영국 배우 제인 버킨은 갱스부르와 가정을 이루고 살며 옷과 신발도 직접 골라 입혔다. 발이 유독 약했던 그가 불편하지 않게 신을 수 있는 건 부드러운 소가죽으로 만든 레페토의 지지뿐이었다. 제인 버킨은 “세르주는 발을 위한 장갑을 찾고 있었고, 레페토가 딱 그런 신발이었죠”라고 말한 적도 있다. 세르주는 제인 버킨과 헤어진 이후에도 지지만을 신었다. 매년 30켤레를 주문해서 1991년 죽을 때까지 신었다. 그리고 레페토의 지지는 세르주 갱스부르를 떠올리면 함께 연상되는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
나의 시그니처 스타일은 세르주 갱스부르를 따라한 건 아니지만, 하얀 스니커즈다. 내 신발장에는 거의 스무 켤레의 하얀 스니커즈가 있다. 그걸 나는 여름에도 신고 겨울에도 신고 슈트와도 신고 청바지와도 신는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하얀 스니커즈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하얀 스니커즈만 신는다.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보겠다고 억지로 신는 게 아니다. 신다보니 좋았고, 좋다보니 신었고, 그러다보니 많이 신게 됐고, 많이 신다보니 더 좋아졌다.
사실 중년의 나이에 완벽하게 새로운 스타일을 찾으려 시도하는 모험은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멋있는 남자는 멋있지만 과도하게 멋 ‘부린’ 남자는 조금 처절해 보인다. 가장 쉽고 간편하게 새로운 스타일을 찾고 싶다면 시그니처 스타일을 찾으시라. 그건 스니커즈 같은 한 가지 종류의 아이템으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만약 당신이 코듀로이(그러니까 ‘골덴’) 재킷을 좋아해서 계속 사서 계속 입고 싶다면? 부끄러워 말고 계속 사 입으라. 결국 그건 사람들이 당신을 떠올리는 순간 함께 떠오르는 시그니처 스타일이 될 거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등산복은 아니다. 등산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그니처 스타일이 될 수 없다. 그건 한국 중년의 정념과 한을 모조리 품은 집단 영혼의 유니폼 비슷한 것이니까 어떻게 입어도 시그니처 스타일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김도훈 공동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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