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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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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옷을 샀다

딱 맞게 떨어지는 코트 사기 어려운 작은 남자에게 여자 코트는 축복…

치마와 브라를 제외한다면 여자의 옷 중에서 남자가 입을 수 없는 건 없다네
등록 2015-01-14 07:03 수정 2020-05-02 19:27

여자 옷을 샀다. 아크네라는 스웨덴 브랜드의 코트다. 무자비한 세일로 저렴하게 샀다는 걸 먼저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칼럼은 어머니도 보고 계시는 것으로 얼마 전 밝혀졌는데, 제값을 주고 좋은 브랜드의 옷을 척척 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새해도 맞이했으니 엄마 백이나 하나 사게 돈이나 부치라”는 전화가 밤 12시에 온다거나, 그런 상황 말이다.
어쨌든 아크네의 코트는 내가 가져본 가장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코트다. 키가 작은 나에게도 완벽하게 떨어지는 드문 코트다. 그렇다. 나는 키가 겨우 165cm다. 지난 20여 년간 모든 프로필에 168cm라고 써왔으나 모조리 거짓말이다. 168cm는 의 조연 중 하나인 ‘슈퍼가드’ 송태섭의 키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를 보면서 가장 감정을 이입했던 캐릭터가 송태섭이었다. 다른 덩치들에 비해 키가 유독 작으면서도 작다는 강점을 이용해 멋지게 승부를 거는 모습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송태섭의 공식 키인 168cm를 내 키로 도입했다. 너무 웃지는 마시길 바란다. 작은 남자들은 작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고, 나는 당시 사춘기였다.
165cm의 남자에게 딱 맞게 떨어지는 코트는 거의 없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는 어쩔 도리 없다. 문제는 소매의 길이와 어깨다. 몸에 한번 맞춰보겠다고 소매와 어깨를 수선하면 전체 길이는 긴데 소매만 유독 짧은 어좁이 모양새가 나온다. 170cm 중반대 이상의 키를 가진 남자들이 긴 코트에 묻히지 않고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걸어가는 근사한 모양새는 거의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코트를 구입하지 않았다. 옷을 구입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핏이고, 제대로 된 핏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예 구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크네의 코트를 만났을 땐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내가 구입한 아크네의 코트는 여성용이다. 이 브랜드는 비슷한 코트를 약간 디자인을 다르게 변형시킨 다음 남자용은 남자 이름, 여자용은 여자 이름을 붙인다. 내가 산 코트의 이름은 ‘엘사’다. 의 그녀 이름이다. 남자용 코트는 ‘찰리’다. 나는 찰리라는 이름이 더 좋다. 하지만 찰리는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올겨울엔 엘사가 되기로 했다.
사실 여자 옷을 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종종 편집매장이나 SPA 브랜드 매장의 여성 코너를 훑어보곤 한다. 패션에서 젠더(Gender)의 차이란 점점 희미해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브생로랑이 여성을 위한 턱시도 슈트를 만든 게 이미 반백 년 전 일이다. 치마와 브라를 제외한다면 여자의 옷 중에서 남자가 입을 수 없는 건 없다. 이미 여자들은 남자 옷을 즐겨 입고 있다. 내가 아는 많은 여자들은 굳이 여성용 오버사이즈 코트를 사느니 각진 남자 코트를 구입해서 근사하게 오버사이즈로 소화해낸다.
이제는 남자들 차례다. 만약 당신이 키가 170cm가 되지 않는 남자라면 긴 코트를 휘날리는 동료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여성 매장의 옷을 눈여겨보시라. 당신 어깨에 딱 맞고 길이도 적당한, 완벽한 핏의 코트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여성 매장에서 뭘 사는 게 부끄럽다면 입어본 다음 약간 겸연쩍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친구 사주려고요, 허허허” 하고 웃으면 그만이다.
물론 구입에 성공한 이후에도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벽이 있다. 여자용 코트는 단추가 남자용과 반대 방향이다. 하지만 누구도 당신 코트에 단추가 달려 있는 방향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눈썰미가 지나치게 좋은데다 오지랖이 과도한 누군가가 “단추 방향이 반대네요? 지금 여자 옷 입으신 거예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라. “전 왼손잡이여서 왼손잡이용 코트만 구입합니다.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나나 나나나나나나 나나….”

김도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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