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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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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 우물 안 남자들

성찰 없는 성찬만, 기득권 남성의 진부하고 딱한 예능
등록 2018-09-22 08:46 수정 2020-05-02 19:29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4명의 프로 대화러’ 진행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KBS 제공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4명의 프로 대화러’ 진행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KBS 제공

지난 9월8일 첫 방송을 한 KBS 의 면면은 언뜻 다채로워 보인다. 뮤지션 유희열과 소설가 김중혁, 전 청와대 대통령 연설비서관 강원국,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 프로그램 누리집의 기획 의도에 따르면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4명의 프로 대화러’인 진행자들이 ‘매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명사 1인을 만나’ 솔직하고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다른’ 시선들의 합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 한국의 수많은 예능·시사교양 프로그램이 그렇듯 에서 마이크의 주인은 전부 30대에서 50대,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인지도를 지닌 이성애자 남성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예정된 것처럼, 이러한 구성은 지금 가장 흥미로운 여성 예능인 김숙을 섭외한 첫 회에서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김숙이 아깝다

“한국 사회의 판세를 바꾸고 있는 분”이라는 찬사와 함께 김숙을 소개한 은 “요새 예능은 주로 남자들이 나와서 지들끼리 다 해먹잖아요”라던 2013년 KBS 연예대상 박미선의 수상 소감에 이어 전체 예능 출연자 중 여성 비율 36.8%라는 성비 불균형을 지적했다. 그러나 마이크를 쥔 여성은 5분의 1, 20%만큼만 존재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들은 선의와 무관하게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tvN 강릉 여행 편에서 유시민 작가가 “오죽헌의 안내문들이 신사임당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율곡의 어머니’로만 축소하고 봉건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며 격분했을 때 출연자 중 여성 비율은 0%였던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기회조차 남성들만이 가질 수 있고 반발 없이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은 이토록 점잖은 기만 속에 공고해진다.

거의 모든 기만이 그렇듯 진행자들은 자신들이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한다. 가령 그들은 김숙이 몰고 온 현상에 이름이 필요하다며 ‘특이점’을 패러디한 ‘숙이점’이라는 표현을 내놓았다. 상찬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숙이점’에 선행하는 남성 중심적 방송 시장의 구조적 문제, 더 정확히는 자신들이 수혜를 입어온 그 구조적 불의를 제대로 호명하는 것이 먼저여야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여성인 김숙의 성취에는 그 자신의 뛰어난 재능, 유능한 기획자 송은이와의 파트너십뿐 아니라 최근 3~4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페미니즘이 함께 작용했다.

김숙은 과거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센’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JTBC 에서 가부장적 남성의 언행을 그대로 뒤집어 보여준 모습이 ‘가모장숙’ ‘퓨리오숙’이라는 별명과 함께 풍부하게 해석되고 대중, 특히 여성 시청자의 뜨거운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 안에서 가능했다. 이를테면 에서 김숙은 선배들에게 배운 여성 비하, 외모 비하 코미디를 답습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후배들에게도 ‘조심하고 공부하라’고 말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러한 그의 성장, 예능인으로서 진화 역시 지난해 방송된 온스타일 처럼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모여 동시대 이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토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뻔한 주례사 토크

그러나 구조적 불의에 대한 통찰 대신 특별한 개인에 방점을 찍고, 오랜 불평등에 맞서 일어난 사회적 변혁을 ‘트렌드’로 취급할 때, 오히려 김숙의 성공 서사는 ‘숙이점’에 이르지 못한 수많은 여성 연예인의 고난과 멀어진다. 그 고민은 일차적으로 당위의 문제지만 또한 토크쇼로서 게스트의 핵심과 어떻게 맞닿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 가상 연애 프로그램 제작진과의 미팅에서 이른바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캐릭터를 요구받은 김숙이 그렇지 않은 성격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섭외에서) 다 까였다”고 털어놓았을 때, 김중혁은 “까인 게 아니라 깐 것 같은데?”라고 반문했다. 김숙을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의 농담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한국 방송계에서 여성들의 입지가 얼마나 눈에 띄게 좁아졌는지, ‘애하고 시어머니가 없어서’ 더욱 예능 출연이 힘들었던 비혼 여성 김숙과 송은이가 팟캐스트라는 시장을 개척하며 어떻게 지금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지 고려했다면 그들에겐 ‘선택’할 기회조차 거의 주지 않았던 기존 질서를 인정하고 좀더 경청했어야 했다.

지코까지 망가뜨릴까

아쉬운 지점은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출연한 2회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현역 정치인을 향한 첨예한 질문도,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에 대한 성찰도 없었다. 대신 40~50대 남성들의 1980년대 회고담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표 의원이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설득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도 굳이 재탕됐다. 진행자들은 방송을 마치며 표 의원에게 계속 “모나게 살아달라”고 당부했지만, ‘모난’ 이야기라곤 나오지 않은 이날의 대화는 ‘주례사 토크’에 가까웠다.

3회에는 가수 지코가 출연할 예정이다. 20대 중반의 아이돌이자 힙합 뮤지션인 그를 떠들썩한 신변잡기 중심의 예능이 아닌 진지하게 ‘대화’하는 자리에 섭외한 시도 역시 언뜻 파격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양하다는 착시를 줄 뿐 별반 다르지 않은, 자연스럽고 견고한 배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과연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까. 정작 진짜 ‘다른’ 경험과 시선이 대화의 재미와 깊이를 얼마나 배가하는지 증명한 김숙은 말했다. “방송국 안에 있는 분들이 그 안에서만 몇십 년씩 있다보니 사회 돌아가는 상황을 더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방송이 세상을 보는 눈에 대한 뼈아프고 정확한 지적이다.

최지은 칼럼니스트*재미있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남자들을 좋아해 대중문화 기자가 되었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에서 일했다. 2015년 이후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과 ‘재미’를 고민하게 되었고, 한국 대중문화와 여성혐오에 대한 책 를 썼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은 가시밭길이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다보니 여기서 재미를 찾기로 했다.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화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다. 다만 ‘최지은의 직시’에서는 주로 TV보다 정색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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