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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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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바닥을 칠 때, 나를 구원하는 것들

사랑하는 영화와 책과 글과 재클린…

리와인드, 리와인드, 리와인드
등록 2018-11-15 17:35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타인의 질문에 대답하는 마음 자세’야말로 마흔 이후 가장 많이 바뀐 내 모습 중 하나다. 예전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심하게 긴장했다. 멋진 대답을 쥐어짜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오히려 점점 스텝이 꼬일 때도 많았다. 지금은 편안하게 내가 가진 가난한 생각의 창문을 그저 열어둔다. 이젠 알기 때문이다. ‘매의 눈’을 지닌 날카로운 독자들 앞에서 나를 숨기거나 치장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강연을 많이 해본 작가들은 ‘독자들의 질문이 매번 비슷하게 반복된다’고 토로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독자들은 겉으론 비슷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때마다 자신만의 간절함을 담아 무언가 남다른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다. 나도 한 사람의 독자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다. 작가에게 뭘 묻고 싶어도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이 질문 자체가 과연 이치에 닿는 것인지’ 망설이다가 그냥 멋쩍게 돌아서서 나올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말줄임표에

연단에 설 때의 나는 이제 나를 바라보는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독자의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좀더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독자에게 역으로 질문한다. “진짜 궁금하신 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독자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질문을 시작한다. “실은요, 제가 고민이 있는데요.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말문을 트며 진짜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나는 독자의 그 수줍은 말줄임표 속에 묻은 망설임을 좋아한다. 이제는 예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실은 때로 이미 드러난 말들보다도 ‘하지 못한 말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독자는 때로 ‘책 속의 말들’보다 ‘책 속에 드러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을 궁금해한다. “아무리 글쓰기가 좋다 해도, 24시간 글만 쓰는 것은 아니시죠?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고 싶을 때는 뭘 하고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정말 글이 안 써질 때는, 진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당황한다. 뭔가 상큼한 묘안을 말해주고 싶은데, 나도 뭔가 뾰족한 수 없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딘가 ‘힘이 팍 들어간’ 멘트를 구상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꾸밈없이 내 일상의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드린다. 돌이켜보면 내가 분명히 의식하고 해낸 것들보다 ‘나도 모르게 그저 마치 가쁜 숨을 몰아쉬듯 해낸 것들’이 나를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좀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예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다시 찾아 읽고, 보고, 듣는다. 좀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들을 보고 또 본다.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가 ‘리와인드’(rewind·되감기)일 정도로, 나는 앞으로 돌리고 또 돌려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리버 피닉스 주연의 같은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보고 또 보기도 하고, 베토벤 현악사중주와 미국 뉴욕이라는 공간의 시들지 않는 매력과 배우들의 아름다운 연기로 매번 ‘완벽하다’는 탄성을 지르게 하는 영화 를 보고 또 보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어김없이, 마치 정확한 화학반응 시간을 지키듯 딱 저번에 눈물을 흘렸던 그 장면에서 또 눈물을 흘리게 된다. 때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주 사소한 장면들의 의미를 뒤늦게 파악하거나 내 나름대로 과도한 해석을 덧붙여서, 남들은 ‘어떻게 그 장면을 보고 울 수가 있느냐’고 비난할 만한 순간에 눈물샘이 터지기도 한다.

나의 힐링 리와인드

내 20대 감성을 키워준 최고의 장소는 학교 앞에서 가까운 ‘영화사랑’이라는 비디오방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거의 혼자 옛날 영화를 보았다. 그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혼자 보았던 영화들은 평생 ‘문약하게’ 살아온 나에게, ‘먹물로 살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대만 영화 를 보며 한 번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죽어간 소년의 넋을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적셨고, 여성 죄수들의 탈주와 감동적인 즉흥 라이브 공연의 이야기를 그린 를 보며 내가 절대 흉내 내지 못할 거칠고 야생적인 삶에 대한 동경을 키우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어딘가 혼자 숨어서 몰래 울기 위해 이런 영화들을 보고 또 보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내 인생이 슬퍼서 울 시간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내지 못한 삶’에 대한 슬픔과 동경 때문에 가슴앓이할 시간이. ‘내겐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한바탕 쏟고 나면 신기하게도 영혼의 열병이 가라앉는다. 다시 나만의 작고 여린 삶을 시작할 힘이 생긴다.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은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원고 마감이 코앞인데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재클린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들어왔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난마처럼 얽혔을 때 그녀의 첼로 연주를 들으면 ‘내가 비로소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런던교향악단과 재클린이 협연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한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올라서가 아니라 ‘네가 가진 것으로 충분해, 너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너 자신의 삶을 연주하고 있어’라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지금도 글이 풀리지 않아 재클린의 첼로 소나타를 듣고 있다. 두 시간 정도 그녀의 첼로 연주를 집중해서 듣고 있으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묵은 감정의 체기가 사르르 내려가는 것 같다. 재클린이 첼로를 연주할 때면 마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첼로 한 대가 더 숨어서, 그녀 곁에 수호천사처럼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녀보다 뛰어난 테크닉을 지닌 위대한 연주자는 많지만, 내게 재클린을 대신할 첼리스트는 없다. 아무도 그녀처럼 연주하지 못할 것 같다.

재클린의 연주에는 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생의 어둠 속에서 인간의 가장 밝은 에너지를 끌어내는 듯한 완벽한 순수가 깃들어 있다. 완벽한 순수, 바로 그것이다. 젊은 나이에 다발경화증을 앓은 뒤 다시는 첼로를 연주할 수 없게 되고 나중에는 온몸이 마비된 그녀를 괴롭히는 고통은 너무도 많았지만, 재클린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첼로 연주를 들었다고 한다. 첼로를 연주하는 순간에는 그녀와 첼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클린의 순수는 남을 불편하게 하는 완벽함이 아니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여전히 수줍고 아기 같은 해맑음을 간직한 순수처럼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머릿속이 수천 개의 막다른 골목으로 가득 찬 미로처럼 꽉 막혀 아무 생각도 해낼 수 없을 때, 유튜브로 재클린의 수십 년 전 연주 실황을 흑백 화면으로 보면서 내 안의 잃어버린 순수를 발견한다. 글을 쓸 때는 이렇게 다짐한다. 재클린의 저 천진무구한 표정처럼 저렇게, 오직 글과 나만 생각하자고. 아니 ‘나’조차 던져버리고 오직 ‘글’만 생각하자고. 생활의 무게와 인간관계의 복잡함에 짓눌려 첫 마음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는 그렇게 재클린의 첼로 연주 소리와 함께 내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오직 재클린, 오직 나

질문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한 경우도 있다. “작가님, 정말 힘들 때는 무엇을 하세요?” 나는 그 질문을 한 독자의 표정에서 ‘표면에 드러난 물음표’보다 더 절박한 무언가를 봤다. 내게 그 질문은 이렇게 해석됐다. “너무 힘들 때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내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눈빛을 보면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만이 알고 있는 뾰족한 묘수’는 없더라도,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독자의 눈빛이 어느새 부드럽고 따스해진다.

정말 재미없는 대답이지만, 나는 정말 힘들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다. 책 읽을 힘도 없다고 느껴질 때조차, ‘책에는 나의 이야기가 없다’고 느껴질 때조차도, 책을 펼친다. 아직은 책보다 더 다정한 친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든 내 투정을 받아주고, 새벽 4시에 문을 두드려도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친구는 책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한창 아이들 키우느라 바쁜 시기이거나 회사 일로 정신없기 때문에 전화하기가 망설여진다. 사실은 고민을 이야기하기 위해 친구에게 수화기를 든 마지막 기억이 10년이 넘은 나는, 마치 익숙한 단골 병원을 찾듯 책을 펼친다. 자기 안에서 언제든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용기가 마흔의 어둠을 견디게 해준다.

무슨 책이든 도움이 된다. 내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촌철살인의 철학적 비전이 가득한 책도 좋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슬픔과 기쁨을 노래하는 시라도 좋고, 오래전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여전히 절반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두꺼운 고전이라도 좋다. 책은 내가 언제든 방문해도 좋은 마음의 주치의가 되어, 내 다급한 노크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내 마음의 간절한 전화벨 소리를 한 번도 무시하지 않고, 그저 거기서 내 하소연을 다 받아주는 친구다. 마치 언제든 모든 이의 아픔을 받아줄 것만 같은 따스한 품을 지닌 커다랗고 푹신한 토토로 인형처럼, 책은 거대한 요람이 되어 내 전 존재의 고민과 슬픔을 완전히 다 받아준다. 마침내 아픔을 치유하는 내 마지막 비장의 무기(?)는 글쓰기다.

‘아, 여기가 바닥이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글쓰기’를 시작한다. 죽어서도 공개하지 않을 이야기,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이야기, 예컨대 ‘나에게 쓰는 편지’나 ‘영원히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인간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절망한다는 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깨달을 나이, 마흔에 나는 더욱 글쓰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글쓰기가 직업이기 때문이 아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세요

나이 들수록 눈에 보이는 인간관계 속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빚어내고 풀어내고 다독일 마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눈물과 흐느낌을 담아낼 마음속 비밀의 화원이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노래를 불러도 좋고, 그림을 그려도 좋고, 정원을 가꾸어도 좋다. 마음속 비밀의 화원을 가꿀 용기의 씨앗이 싹트는 곳에서 우리의 찬란한 마흔은 꽃필 터이니.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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