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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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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클로버] 간밤 잘 주무셨나요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잠을 잃어버린 뒤
등록 2020-09-08 10:34 수정 2020-09-11 01:20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2019년 10월부터, 몸의 변화에 따라 용량은 들쭉날쭉하지만 스테로이드제를 오래 복용하고 있다. 여러 가지 부작용은 당연지사다. 얼굴이 붓는 것을 가장 눈에 띄는 부작용으로 꼽을 수 있지만, 고질적인 수면 장애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잠을 잃어버렸다. 눈꺼풀에 달콤한 잠이 매달리는 걸 느껴본 지 얼마나 오래됐나.

잠들기까지 두어 시간을 뒤척여야 하는 날이 많다. 운 좋게 쉽게 잠이 들어도 푹 자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여러 번 깬다. 아침에 이젠 정말 일어나야 하는 시각에 눈을 뜨면 밤새도록 생각한 것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온몸이 피곤함에 잠긴다. 머릿속을 잠시 스쳐간 온갖 생각은 새가 모래사장을 지나간 듯 족적을 남긴다. 이 작은 발자국들은 파도가 두어 번 치는 거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새벽녘 얕은 잠은 생각들이 가지 친 길을 지워주지 않는다.

어릴 때 읽은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의 <박지원의 친구들> ‘민옹’ 편 이야기를 보면, 민옹은 우울증 증세로 불면을 겪는 주인공에게 “밤에도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남들보다 오래 살아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내용을 읽고 민옹의 꾸밈없고 긍정적인 생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불면증을 약간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남들이 다 잠든 시간에 쓸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나의 밤은 나만의 시간이되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환자에겐, 쉬면서 밤을 보내지 않은 대가는 가혹하다. 다음날 사용할 체력을 밤에 끌어당겨 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루 충전해서 하루 사용하는 삶을 살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잠을 소중히 끌어모아서 아껴 쓰는 절약 정신을 가지게 된다.

이제 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 두렵다. 침대에 누워 벽 두 개와 천장이 만나는 방의 꼭짓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출구를 잃어버린 동굴에 갇힌 기분이 든다. 석회동굴의 천장에서 종유석이 드리우듯 생각이 뾰족하게 자라난다. 똑, 똑, 떨어지는 생각의 찌꺼기가 바닥에 석순을 키우면 석순마다 이름을 붙여본다. 외로움. 내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 그리고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다. 밤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실제 있었던 일들이 부풀려져 더욱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떠오른다는 것. 밤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린다. 아무 곳에 의지하지 않고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그리고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손에 쥐고 밤을 통과한다.

마침내 아침이 되면 가족이 잘 잤냐고 묻는다. 대답한다. “그냥, 그럭저럭 잤어.” 아예 못 잤냐면 그건 아니고, 그렇다고 잘 잤다고 대답하기에는 억울하다. 잠을 설쳐서 피곤하고, 무거운 머리를 지고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지난밤이 평안하지 않았다보니, 매일 온·오프라인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밤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잤을까. 아니면 고민거리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까. 어쩌면 몸 어딘가 불편해서 한참 끙끙 앓다가 겨우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밤은 아침에는 알 수 없는 많은 것을 덮고 삼키고 지나간다. 오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지난밤 사연 없이 별다르지 않게 잘 보냈기를, 오늘 밤 쉽게 잠 이루기를 바라는 날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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