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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공간] 추사가 서촌을 ‘장동’이라 부른 까닭

조선 후기 정치·문화 주도한 서촌의 장동 김씨 영향 추정
등록 2020-10-05 13:30 수정 2020-10-08 02:01
조선 때 ‘장동’이라 불렀던 서촌의 모습. 김규원 기자

조선 때 ‘장동’이라 불렀던 서촌의 모습. 김규원 기자

“날이 4월임에도 이리 춥사온데, 어머니와 한결같이 잘 지내시옵니까? 아버님께서는 감기로 불편하시다 하던데 어찌 하오신지요? 즉시 나으시고 모든 일이 한결같으신지 멀리서 애태우는 마음이 끝이 없사옵니다. 대구 감영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편안하옵니까?”

대구에 있던 아내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

1818년 4월26일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대구 감영에 머물던 아내 예안 이씨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 아내 이씨는 당시 경상 감사로 일하던 추사의 친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대구 감영에 가서 살림을 돕고 있었다. 혼자 서울에 남은 추사의 이 편지엔 아내와 부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아내에게 꼬박꼬박 “하옵니다” “하옵니까” 하고 높임말을 쓴 것이 이채롭다. 당시 김정희는 1819년에 열리는 대과(문관 시험)를 준비하느라 서울 집에 머물던 터였다.

이 편지는 봉투와 함께 남았는데, 겉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녕녕, 내아 입납, 장동 상장, 근봉”. 여기서 ‘녕녕’이란 ‘안녕하시라’는 뜻이고, ‘내아 입납’은 ‘관청의 안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장동 상장’은 ‘장동에서 편지 올린다’는 뜻이고, ‘근봉’은 ‘삼가 봉한다’는 뜻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보내는 곳’ ‘받는 곳’을 쓴 것이다.

여기서 ‘장동’이 눈에 띈다. 장동은 어디를 말할까? 경복궁 서북쪽에 있는 현재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 궁정동 일대를 말한다. 당시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장동이었다. 그런데 김정희가 살던 집 월성위궁은 현재의 종로구 적선동에 있었다. 당시엔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다. 경복궁 서십자각 네거리 부근이다. 그런데 왜 김정희는 ‘적선방’이나 ‘월성위궁’이라 쓰지 않고 ‘장동’이라 썼을까.

월성위궁은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이 되며 영조에게서 받은 집이었다. 월성위궁은 영조가 사랑하는 딸의 집이었고,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바로 남쪽에 있었다. 특히 김정희의 친아버지 김노경과 양아버지 김노영이 큰 벼슬을 했기에 도성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월성위궁이 있던 동네를 ‘월궁골’ ‘월궁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월성위궁은 경복궁 서남쪽 끝에 있고, 장동은 경복궁 서북쪽 끝에 있어 서로 수백 미터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의통방(통의동)이란 지역도 있다. 따라서 김정희가 자신이 살던 월성위궁을 장동이라 표현한 것은 조금 이상하다.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간송미술관 소장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간송미술관 소장


추사가 실제 살던 곳은 적선동 월성위궁

김정희가 편지에 장동이라 쓴 맥락을 이해하려면 1세기 먼저 활동한 화가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을 펼쳐봐야 한다. 현재의 서울 서촌 일대 명승지 8곳을 그린 화첩인데, 국립중앙박물관(1755년)과 간송미술관(1751)에 하나씩 두 본이 남아 있다. 모두 16장의 그림이지만, 중복된 곳을 빼면 11곳을 담았다.

이 그림첩을 보면, 이미 정선이 살았던 17~18세기에 장동의 범위가 효자동과 궁정동 일대에서 서촌 전체로 확장됐음을 알 수 있다.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11곳이 서촌 전체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창의문과 백운동, 자하동(이상 자하문터널 위), 청송당(경기상고 안)은 서촌 북부, 대은암과 독락정, 취미대(이상 청와대 일대), 청풍계(청운초 북쪽)는 서촌 북중부, 수성동과 청휘각(이상 옥인동), 필운대(필운동)는 서촌 중남부에 있다.

정선이 <장동팔경첩>을 통해 장동의 실질적 공간 범위를 서촌 전체로 확대한 것은 정선의 스승이자 후원자인 장동 김씨 여섯 형제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정선은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 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나이 들어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안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경복고는 장동의 바로 윗동네이고, 군인아파트는 옥류동의 바로 아랫동네이다. 장동과 옥류동은 모두 장동 김씨들의 터전이었다.

장동 김씨 여섯 형제는 영의정 김창집, 대제학 김창협, 사헌부집의 김창흡, 이조참의 김창업, 왕자사부 김창즙, 김창립이다. 김상헌의 증손이자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인 이 형제들은 각자 분야에서 모두 일가를 이뤘다. 김창집은 정선을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했고, 그 뒤로 이 형제들은 재정적·학문적으로 정선을 후원했다. 그 후원으로 정선은 <장동팔경첩>을 비롯해 서울과 금강산 등의 진경산수화 수백 점을 남겼다.

아마 정선이 자신을 후원한 장동 김씨 형제들의 활동 무대를 그린 그림이 <장동팔경첩>이었던 것 같다. 서촌 전체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첩에 ‘장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장동 김문’으로 알려진 이 유력 집안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장동’이란 말이 이 집안의 대명사처럼 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장동 김씨 형제들이 펼친 정치, 문학, 예술 활동은 조선 후기까지 조선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정선보다 1세기 뒤에 태어난 김정희도 이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정희의 집안도 정승과 판서, 부마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조선 제1의 권력 가문이던 장동 김씨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또 김정희도 장동 김씨들과 마찬가지로 서인 노론이었다. 김정희가 아내에게 쓴 편지 봉투에 자신의 집을 ‘장동’이라 쓴 데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1818년 김정희 편지의 봉투에 적힌 ‘장동’. 개인 소장

1818년 김정희 편지의 봉투에 적힌 ‘장동’. 개인 소장


500년 역사 ‘장동’ 지명 영영 사라지나

2010년 서촌이 한옥지구로 지정되면서 지명이 논란이 됐다. 어떤 이들은 서촌이 과거에 ‘서소문’이나 ‘정동’ 일대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서촌의 옛 이름이 ‘웃대’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서울 종로구청은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긴 논란 끝에 ‘서촌’이 사실상 승리했지만, 현재도 서촌의 공식 명칭은 ‘경복궁 서측’이다.

그러나 이 오랜 논란 속에서도 조선 500년 동안 사용된, 유서 깊은 ‘장동’은 거론되지 못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진 뒤 완전히 잊힌 것이다. 태종 이방원과 세종 이도, 성혼, 정철, 이이, 이항복, 김상용, 김상헌, 정선, 김정희 등 수많은 인물이 활동한 ‘장동’은 그렇게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최종현·김창희, <오래된 서울>, 동하, 2013
정창권,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돌베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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