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도서정가제] 종이책엔 엄격, 전자책엔 유연해져야

‘돌고 돌아 현행 유지’ 결정한 도서정가제, 종이책과 전자책 구분해 가격정책 정해야
등록 2020-11-15 11:28 수정 2020-11-20 00:37
현행 도서정가제는 할인 여력이 있는 판매자에게만 유리하다. 한 동네책방의 모습. 정용일 기자

현행 도서정가제는 할인 여력이 있는 판매자에게만 유리하다. 한 동네책방의 모습. 정용일 기자

11월3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사회적 논란이 있었던 도서정가제에 대해 3년 전처럼 ‘현행 유지’ 수준에서 약간 보완하는 내용으로 정책 방침을 발표했다. 출판사의 재정가 책정 가능 기간을 도서 발행 뒤 18개월에서 12개월로 줄이고, 도서관 등의 공공 구매에선 10% 한도 할인 외에 경제상 이익 제공을 없앤다는 게 뼈대다. 이를 받아 11월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문체부가 결정한 방안에 더해, 그간 요구가 많았던 지역서점을 지원하는 근거 조항을 담았다.

어정쩡한 제자리걸음

이처럼 ‘돌고 돌아 현행 유지’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3개월간 도서정가제 논의가 상당히 뜨거웠다. 문체부 장관이 3년 주기로 재검토하도록 규정된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조항 때문이다. 2019년 여름부터 출판·서점·소비자 단체와 정부가 참여한 민관 협의체가 1년간 논의한 끝에 ‘현행 유지’로 가닥을 잡았으나,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에 20만 명이 동의할 만큼 소비자 반발이 컸던 점을 고려한 ‘윗선’의 주문에 따라 소비자 후생을 위한 ‘추가 검토’를 하면서 생긴 논란이 퍼졌던 까닭이다.

작가, 출판, 서점, 도서관, 독서 관련 36개 문화계 단체가 모인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는 11월4일 입장문을 내고, 애초 민관 협의체의 합의안대로 나온 문체부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입장에선 도서정가제가 후퇴하는 개악을 막은 측면에선 분명 다행이지만 마냥 환영할 일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디지털 패러다임 속에서 출판산업은 변곡점을 맞아 확실히 진화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어정쩡한 제자리걸음을 했으니 상당한 퇴화라 봐야 한다.

도서정가제는 저자, 출판사, 유통사, 서점, 도서관, 독자 등 책 생태계 전체가 이 제도의 변화로 출렁거리고 생사가 갈리는 책의 대지(大地)와 같은 기반 정책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지향이어야 하는가.

첫째, 종이책은 확실한 도서정가제를 제도화해야 한다. 도서정가제 목표는 책값과 유통 질서를 안정화하고, 책 생태계의 상생을 통한 출판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현행법은 도서 정가의 15% 이내에서 가격 할인과 경제상 이익을 조합해(가격 할인은 10% 이내로 제한) 할인 판매와 마일리지 제공 등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할인 여력이 있는 판매자에게만 유리해 출판산업 생태계 전체의 균형발전과 업체 형태, 규모(온·오프라인 서점, 대형과 소형 서점 등)의 동반성장 효과를 전혀 기대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는 인터넷서점 등 일부 대형 업체만 15%의 직간접 할인이 가능하다.

도서의 정가는 하나인데 ‘판매가’가 판매처마다 달라지는 건 도서정가제의 기본 원칙과 상충한다. 도서정가제 아래 할인율 규정은 곧 거품 가격을 뜻한다. 인터넷서점 점유율이 50% 이상으로 세계 출판시장에서 가장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국 출판시장의 왜곡을 더욱 가속할 뿐이다. 도서정가제가 이전보다 강화된 지난 6년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전국 각지에 개성 만점의 동네서점이 늘어나는 첩경은 종이책 할인율을 없애는 것이다.

자율협약 법제화해야

둘째, 전자책에 대한 유연한 정가제 적용이 필요하다. 현행법은 종이책과 전자책의 매체 형태 구별 없이 도서정가제 조항을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러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적 이용에 따라 종이책 기반의 전자책 외에 웹소설과 웹툰 등 다양한 형태의 전자책이 크게 활성화하는 추세다. 독자가 전자책을 입수하는 방법도 정가로 사서 콘텐츠를 ‘소유’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대여나 구독 등의 서비스 형태로 콘텐츠를 ‘이용’하는 방식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수익모델과 판매 방식이 정형화한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그 방식이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이를테면 ‘정기구독’ 모델은 독자가 월정액을 몇천원만 내면 플랫폼 업체가 보유한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낱권 정가 판매와 병존하기 어려운 서비스고, 기존 도서정가제로는 가격제도를 규율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사업모델을 기존 도서정가제 틀로 무리하게 규율하면 성장하는 사업 방식을 억누르는 역효과가 클 것이다. 대다수 전자책 사업자나 전자책 독자가 정가제를 반대하는 이유다. 전자출판물 중 낱권 또는 세트의 ‘정가’에 따른 판매가 아닌 ‘대여’ ‘구독’ 등의 방식으로 파는 콘텐츠는, 현행과 같이 도서정가제 적용 범위에서 제외해 가격제도를 선택 운용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종이책 기반의 전자책, 오리지널 전자책에 대한 정가제의 접근법도 달라야 한다.

셋째, 민간 자율협약을 법제화해야 한다. 현행법에 ‘경제상 이익’ 제공 허용 범위와 그 정의가 규정됐음에도, 도서 판매자 외에 신용카드사 등 제3자가 인터넷서점 등에만 추가 제공하는 경제상 이익이 민간 자율협약에 따라 15%까지 별도 인정돼 최대 30%의 직간접 할인이 허용된다. 이는 자율협약이 법을 보완하는 게 아니라, 도서정가제 시행 취지를 훼손하고 불공정한 경쟁 환경을 묵인하는 것과 같다. 전자책 대여를 3개월로 규정한 민간 협약 내용도 법제화가 필요하다.

넷째, 출판·서점계가 노력해 도서정가제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사회적으로 더 넓혀야 한다. 상당량이 팔린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의 경우 아주 저렴한 염가판 도서를 발행해 독자에게 책값 부담을 줄이면서 독서 환경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할 책무가 있다고 본다.

베스트셀러 내면 염가 도서 낼 수 있도록

책 생태계는 저자-출판-독자 중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하기 어려운 동반자 관계다. 모두 함께 사는 길, 독자의 독서권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책 생태계를 풍요롭게 하는 길, 진짜 도서정가제의 실행을 바란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