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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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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지 않던 나’ 대신 다른 이를 돌보며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전시기획자 전포롱
등록 2022-09-06 08:23 수정 2022-09-10 23:05
전포롱의 작업실 겸 집. 그림을 그리며 어두운 감정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작업대 근처에 아기자기한 물건을 함께 둔다고 했다.

전포롱의 작업실 겸 집. 그림을 그리며 어두운 감정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작업대 근처에 아기자기한 물건을 함께 둔다고 했다.

“저는 너무 당연히 그리는 사람이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삶은 상상한 적 없다고 했다. 하얀 벽지를 크레용 색으로 채워가던 꼬마는 또래들이 있는 어린이집이 아닌 미술학원으로 갔다. 중학생 언니 오빠들 틈에서 소묘용 석고상을 따라 그리며 컸다. 그러고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전포롱은 어딘가 모자란 아이였다.

“사립학교였고 한 학년에 두세 반밖에 없었어요. 전교생이 서로 다 아는 그런 학교. 저는 거기서 늘 모자란 아이였어요. 우리 집은 못사는데 너무 잘사는 애들만 있는 학교에 간 거예요. 유일하게 잘하는 게, 남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고 칭찬하는 게 그림이었어요. 제가 그린 만화 캐릭터를 받으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애들이 늘 있었고. 그때는 그걸 제 유일한 쓸모처럼 느꼈던 것 같아요.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구나. 그림을 그려야겠다.”

다 쏟아내고 끝난 연애

당연히 그리는 사람, 전포롱(33). 하지만 작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는 사진작가에게 전포롱은 이렇게 말했다. “안 그린 지 반년쯤 됐는데요.” 평생 해온 일을 그만뒀다. 상상해본 적 없는 삶을 사는 중이다.

“세상의 다양한 색을 모아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 전포롱입니다.” 그가 전업작가 시절 하던 소개말. 다양한 색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저에게 파스텔톤의 굉장히 따뜻하고 귀여운 그림을 그린다고 이야기해주는 분도 있고, 내면의 우울하고 어두운 부분까지 비춰줘서 위로된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그 둘 다 제 그림이에요.”

처음에는 밝은 톤의 그림만 그렸다. “그럴수록 다 거짓말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자신의 속은 잔뜩 곪아 있는데, 그림은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듯 밝기만 했다. 그림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내려는 안달이 보였다. 언제까지 초등학교 교실에 머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부정적인 감정도 그림에 막 쏟아냈어요. 처음에는 우울하고 어두운 감정을 해소해보려고 그렸던 건데… 어느새 그게 저를 잡아먹더라고요. 계속 더 센 감정으로 가져와, 내가 나한테 시키는 거예요. 그 시기를 지나고는 나를 좀 내려놓는다는 생각으로 그렸어요. 그렇게 제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아등바등하면서 어떻게든 다 그려냈더니, 더 그리고 싶은 감정이 없는 거예요.”

마치 연애 같다고 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내고 끝난 연애는 오히려 아쉬울 게 없잖아요.” 연애의 끝이 그렇게 쉬울 리 없다. 얼마나 좋아했는데.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고 웃던 그가 작업에 들어가자 표정부터 바뀐다. 사뭇 진지하다.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고 웃던 그가 작업에 들어가자 표정부터 바뀐다. 사뭇 진지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재료

좋았던 날로 돌아가보자. 10년 전 그때는 색연필로 그렸다. 얇고 단단한 색연필 심으로 도화지를 빈틈없이 메웠다. 틈새 하나만 보여도 계속 칠했고 선 하나만 비어져 나가도 다시 그렸다. 당연히 손목 통증이 심해졌다. 다른 재료를 찾아야 했다. 아크릴, 유화, 수채화, 연필 소묘. 헤매던 끝에 오일파스텔을 만났다.

“크레파스 같은 재료여서 제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누구한테 보여줘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리지 않잖아요. 그냥 그리고 싶으니까. 그때로 돌아가 그릴 수 있는 재료여서 너무 좋은 거예요.”

오일파스텔은 발색이 좋아 손도 많이 가지 않았다. 다양한 색감과 더불어, 이때부터 자유로운 터치가 전포롱 그림의 특징이 됐다. 사진 촬영을 위해 오랜만에 오일파스텔을 잡아봤다는 그를 따라 나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감촉이 좋다. 어떤 것은 꾸덕꾸덕하다 못해 찐득하다. 촉감에 놀라 그를 보니 그가 웃으며 자기 손을 보여준다. 색칠 장난을 한 아이 손처럼 엉망이다. “여름 되면 얘네가 완전히 녹아요.” 작업할 때는 그 손으로 아무것도 못 만졌단다. 그가 가는 길마다 색색의 흔적이 따라다녔다.

조금 더 조몰락거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파스텔을 내려놓는다. 만져보니 오일파스텔 드로잉이 최근 직장인 힐링 취미로 부상한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전포롱이 오일파스텔을 처음 접했을 때는 국내 판매처도 제대로 없었다. 그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도구였다. “처음 본 이 재료가 너무 재미있어서 안달이 났던 시기가 있어요. 알고 싶어서. 1~2년을 푹 빠져서 매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렸어요.”

한 길이 넘는 넓은 탁자를 가리킨다. 그 탁자를 가득 뒤덮을 정도로 그리고 또 그렸다. 그 시간을 거쳐 언젠가부터 오일파스텔을 손에 딱 쥐면 하얀 도화지 안은 전부 내 세상이었다. “바깥세상은 도저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없고 내 감정 하나조차 내가 감당할 수 없는데, 무슨 색을 쓸 건지 무얼 넣고 뺄 건지 얼마나 번지게 할 건지 다 내가 정해서 그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정말 즐겁거든요.”

같은 이유로 그림은 괴롭다.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오로지 기법, 오일파스텔이라는 재료를 다루는 그거 하나인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일은 제 마음대로 못하거든요.”

그는 도구를 다루는 일과 작품을 만드는 일을 구분해 말한다. 안 그래도 물어볼 참이었다. 서른 중반 나이. 베테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하는 인터뷰가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그림작가로는 너무 부담스러운데, 이 재료를 다루는 사람으로 이야기한다면 부끄럽지 않아요. 오일파스텔만큼은 내가 정말 잘 안다고, 이거는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요.”

많이 다루어봤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려내는 속도가 빠르다. 손이 분주히 움직일 때마다 안으로 둥글게 말린 어깨와 사선으로 기울어진 등이 들썩인다. 저 자세를 안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붙박여 일한 사람만이 가지는 뒤태가 있다.

같은 그림을 수십 번은 그렸을까. 작업 속도가 빠르다. 촬영하던 사진작가가 연신 “조금만 천천히”를 외친다. 전포롱의 작업량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그림을 수십 번은 그렸을까. 작업 속도가 빠르다. 촬영하던 사진작가가 연신 “조금만 천천히”를 외친다. 전포롱의 작업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10년 내내 한 걱정

전포롱이 주로 그리는 대상은 인물이나 캐릭터의 얼굴이다. 표정은 수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가두니까. 거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제가 강박적으로 메모하고 스케치하고, 그런 습관이 있었거든요.” 한때는 메모 노트만 몇 권씩 들고 다녔다. 떠오르는 모든 단상을 붙들어놓고 싶었다.

“지하철 같은 데서 모르는 사람 표정을 막 그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례해요.” 감정을 담은 그릇을 그리려다가 그 근원에 있는 사람을 놓치고 지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사람 얼굴이 구도로만 느껴지는 순간도 있어요. 내가 사람을 이렇게 대해도 되나? 후회도 하고. 차츰 작업 방식을 달리하면서, 상대를 온전히 들여다보려 애썼죠. 내가 그리는 대상을 온전히 느껴야지 그림이 더 깊어지는 것도 맞으니까요. 그런데 또 작업하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느껴버리면 제가 너무 힘들어지더라고요.”

알 수 없는 타인을 알려니 괴롭다. 그리는 일은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좁은 화폭 밖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더 많은 일이 기다린다. 작품을 두고 하는 사람들의 평과 그것을 생계로 연결하는 일.

마감을 앞두면 몇 날 며칠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학부생 때는 양배추만 먹으며 사는 애로 유명했단다. 그러니 툭하면 응급실행이었다. 아무리 씻어도 손톱 안쪽까지 들어찬 검붉은 파스텔을 핑계 삼았지만, 의식주 일상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불안 때문에 먹지 못했고, 불안에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자지 않고 그렸다.

“그림으로 돈을 번 기간이 딱 10년인데 그 10년 동안 이 생각뿐이었어요. 사람들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지? 시간은 모자라고 체력은 너무 달리고.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게 최선의 작품일까.”

전포롱의 그림을 아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은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 새로운 경향의 전시 공간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생명 자체가 길지 않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해가는데, 하루라도 작품을 안 올리면 나는 잊히겠구나.” 조회 수로 자신을 하루하루 증명해야 하는 삶. 지칠 만도 하다. 창작자로서도, 노동자로서도 지쳤다.

오늘은 손이 깨끗한 편이라고 한다. 기름기 많은 오일파스텔은 발색이 좋은 만큼 피부에도 잘 들러붙는다. 작업자의 손은 늘 알록달록하다.

오늘은 손이 깨끗한 편이라고 한다. 기름기 많은 오일파스텔은 발색이 좋은 만큼 피부에도 잘 들러붙는다. 작업자의 손은 늘 알록달록하다.

그림 그리다 그림을 사랑하고, 결국은 그림

그래서 여기 지쳤기에 작품활동을 그만둔 전직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느냐고? 아니다. “이왕 살 거면 조금 더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다만 그리는 일을 졸업했을 뿐이다. 그의 졸업작품이라 할 만한 것은 <꽃의 이름으로>라는 그림 책자. 3년 전, 그림을 그만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생각이 뒤따라왔다. 그러면 더는 살 의미가 없지 않나.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으로 프랑스에 갔다.

“죽겠다고 다짐하고 간 건데 프랑스 화방에 가서 오일파스텔을 사고 있는 거예요. 더는 안 그리겠다고 간 건데.”

다음 행선지는 모네의 정원. 클로드 모네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 그의 대표 작품인 연작 <수련>이 여기서 그려졌다. “꽃들이 너무 열심히 피어 있는 거예요.” 풍성한 색채를 머금은 나무들에서 자기 삶을 충실하고도 묵묵하게 받아들인 이의 얼굴을 읽은 걸까. 돌아와 꽃을 그렸다. 꽃들에 이름을 지어주고 얼굴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몇 년 더 그렸다. 그리고 2021년 겨울, 그림 그리는 일을 멈췄다.

다른 공부를 하고, 다른 일도 했다. 그림밖에 모르고 살아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동료들 부탁으로 전시나 펀딩 기획을 도와주게 됐다. “해보니까 저 잘하는 거예요. 그리던 거랑 완전히 다른 감정으로 즐거운 기분이어서. 그리는 일에는 여러 감정이 들러붙으니까 내가 그림을 진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데. 오히려 미워한다고 느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는 돌아왔다. 이번에는 전시기획자로. “돌고 돌아 찾은 게 결국 그림인 거예요. 그림 그리는 거 말고, 그림을 사랑하는 거.”

숙련의 결과로 얻은 ‘시선’과 ‘시야’

이 초보 기획자는 만족스럽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제 그림에 끼워 넣으려 할 때는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이 기획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를 찾으면 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이 작가에게서 이걸 끌어내면 뭔가 작품이 확 열릴 것 같은데. 이런 게 보이니까. 실제 그렇게 됐을 땐 너무 기분이 환상적이고요.”

볼 줄 아는 눈은 숙련의 결과이다. “아마 제가 너무 괴로워하며 해봤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보이는 거 같아요.” 갈고닦아 기술을 익힌 사람만이 타인의 기술을 알아볼 수 있다.

서울 을지로에 작은 전시실을 마련했다. 브레이브 썬샤인. 달빛이 담긴 그림을 그리던 이가 햇볕이 잘 드는 3층에 공간을 열었다.

“손목이 아프고 목도 안 좋고. 저는 허리가 아파서 잘 뛰지도 못하거든요. 그렇지만 내가 일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몸의 변화가 무얼까 생각해보면, 저는 자꾸 남의 몸에 시선이 머물게 되는 거예요. 저 동료도 나처럼 못 챙겨 먹을 텐데. 밥 사주고 비타민 챙기고.” 자신은 챙기지도 않던 손목보호대를 사서 동료에게 선물한다. 늘 그림이 우선인지라 자신의 통증에 무관심했다. 의미 없는 아픔의 시간인 줄 알았는데 타인의 몸을 살필 수 있는 시야를 얻었다. 기획자가 된 전포롱은 기회가 없던 어제의 자신을 거울삼아 다른 작가들의 내일을 걱정하게 됐다. 발버둥이라 부를 만한 노동과 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던 창작활동 저편에선, 일러스트(일러스트레이션)를 ‘예쁜 그림’ 정도로 취급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 좁은 자리마저 여성 창작자에겐 잘 주어지지 않았다.

“제가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면서 아무리 해도 안 됐던 것들, 기회를 얻는 일들, 그걸 제 동료들은 되게 해주고 싶었어요.”

브레이브 썬샤인은 그 바람을 이룰 공간이라 했다. 그의 첫걸음이다. 걱정되지 않냐고 물으니 이리 말한다.

“무사히 끝내겠다는 용기를 내고 나니까 시작할 용기는 필요도 없더라고요.”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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