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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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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깨끗한 인쇄소의 정중동

89살 식자공 권용국, 2㎜ 활자를 핀셋으로 짜맞추는 베테랑의 무거운 책임감
등록 2023-01-09 13:04 수정 2023-01-10 00:20
권용국(89) 선생은 열여섯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어 식자공 일을 배웠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활판공방에서.

권용국(89) 선생은 열여섯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어 식자공 일을 배웠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활판공방에서.

출판·인쇄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음에 관해 묻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그곳은 꽤 시끄러우니까. 인쇄기가 각종 소음을 만들어내는 좁은 작업장을 떠올리며 묻는다.

“작업장이 시끄러웠나요?”

백발의 그가 고개를 젓는다.

“고요했어요.”

정적이 흐를 정도로 조용하지 않으면, 활자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놓는 작업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의 일터는 고요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모든 세계가 정적을 머금고 있다. 보청기를 찾지 못한 그는 내 질문을 알아듣지 못할 때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목소리를 키우며 묻는다.

“이 일을 언제 시작하셨어요?”

활판공방의 권용국 선생의 조판대.

활판공방의 권용국 선생의 조판대.

인쇄소에서 기름 안 쓰고 깨끗한 업

노동의 시작을 묻는 내게 권용국씨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하고 말끝을 흐린다. 이야기의 시작점을 고르는 그에게서 90년 인생이 느껴진다. 1934년생. 올해로 89살이다.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로 이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해방이 되고, 38선이 생겨났다. 고향인 서울로 가는 길이 막히자 가족은 야밤에 한탄강을 건넜다. 이후 친척 집을 전전했다. 먹을 것은 없고 누나는 시집가고 동생들은 어렸다. 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국민학교를 늦깎이로 졸업한 열여섯 살, 생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용산 피복장에 갔어요. 시끄럽고 덥고 돈도 적고. 그건 직업이 아니겠더라고요. 어머니 오빠가 계셨어요. 경향신문사를 다니셨는데, 그분이 인쇄소에 넣어줄 테니까 우선 다니라 한 거죠. 이제 납을 만지게 된 거예요.”

그가 맡은 업무는 식자. 지금이야 원고 작성부터 인쇄까지 모든 과정이 컴퓨터로 이뤄지지만, 그 시절엔 활판인쇄를 했다. 쇠나 납을 녹여 활자 조각을 만들고, 이 활자를 원고 모양대로 활판에 줄 맞춰 배열한 뒤, 인쇄기에 올려 찍어낸다. 이때 활판에 활자를 배열해 채우는 일을, 글자를 심는다고 하여 식자(植字)라 불렀다. 흔히 ‘조판공’이라고 하는데, 권용국씨는 스스로를 식자공이라고 했다. 조판은 활자를 골라내는 일 ‘문선’과 그것을 배열하는 ‘식자’ 둘로 나뉜다.

“인쇄소에 갔더니 과(부서)가 예닐곱 개 정도 돼요. 나머지는 전부 기름칠하는데, 식자만 기름 안 쓰고 깨끗한 업인 거예요.”

식자공들 옷만 말끔하더랬다. 잉크도 접착제도 묻을 일이 없으니 기름칠해 손 닦을 일도 없었다. 평생 할 일이라면, 저런 깔끔한 직업이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월급도 없어요. 그냥 고무신값, 그런 거나 줬지. 3개월 되니까 월급을 조금씩 주더라고요. 그래도 이걸 배워야겠구나 해서 다녔지.”

월급은 없어도 신입이 해야 할 잔일은 많았다. 그중 하나가 글자집 심부름.

“그때는 글자집이 많았어요. 인쇄소에 없는 글자(활자)가 많아요. 없으면 글자를 사러 가요.”

식자과에 널린 것이 활자였으나, 필요한 활자는 그보다 많았다. 책 한 쪽에 글자가 1천여 개 들어간다. 1천여 개의 활자와 그 수만큼 공목과 행간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공목은 자간 자리를, 행간목은 줄글 사이를 메운다). 활자 종류도 다양한데, 가갸거겨… 자음과 모음을 결합해 만들 수 있는 한 글자 수만 해도 수천 가지. 이 글자들이 글꼴과 크기(호수)별로 있고 여기에 숫자와 외국어 철자, 각종 부호와 기호가 추가된다. 작은 인쇄소에서 보유할 활자 수는 한계가 있으니, 견습공이 심부름 가는 일만 잦다.

“명동성당 옆에 있는 동화활자소, 을지로 입구에 있는 영일활자소. 그런 데는 그래도 갈 만한데, 먼 데를 가면 교통비를 뭐 줍니까, 걸어다니지. 차도 별로 없어서 걸어 왔다 갔다 하면 2시간, 3시간. 심부름하다보면 기술을 못 배우는 거예요. 빨리 심부름 끝내고 기술 배워야 하는데, 그 생각만 했죠.”

고무신 닳게 서울 시내를 헤매었다. 일은 눈치껏 배워야 했다. 운이 좋으면 식자공 작업대(조판대)를 빌릴 수도 있었다.

“일하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이리 와, 이거 한번 해봐’ 이 소리가 나오니까. 잘 보이지 않으면 만날 뭐 하게요. 심부름하면서 양말이나 빨게요.”

식자공들 저마다 작업대가 있는데, 다른 이들이 손도 못 대게 했다. 남들 눈에는 잿빛 조각과 길고 짧은 판막이 어지러이 쌓여 있을 뿐이지만, 그 나름의 질서가 있다. 흐트러지면 손톱만 한 활자 조각을 찾아 헤매야 한다. 누가 더 많은 판을 짜는가. 시간 싸움을 하는 이곳에서 일이 능숙하다는 건, 숱한 활자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 작업대를 견습공에게 내준다는 것 자체가 식자공에겐 크게 선심 쓰는 일이었다.

글자 간격을 정교하게 맞추기 위해 아주 얇은 쇠판을 넣고 뺀다.

글자 간격을 정교하게 맞추기 위해 아주 얇은 쇠판을 넣고 뺀다.

“아무거나 줘도 다 합니다”

석 달 뒤 권용국씨에게도 작은 작업대가 주어졌다.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실력이 곧 몸값인 세계였다. 가장 품삯을 많이 받는다는 1급 식자공이 되고 싶었다. 남들보다 일찍 나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직장을 옮겼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월급이 오를 줄 몰라요.”

막내로 들어간 곳에선 기술이 늘어도 막내였다. 이직을 반복해 자신의 기능(등급)과 임금을 올리는 건 기술자에겐 흔한 일. 새 직장에서 실력을 증명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판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책자를 너끈히 해내는 것. “가면 물어요. 뭐가 제일 자신 있습니까?” 이리 답했다. “아무거나 줘도 다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자리(조판대)가 얼마나 비싼 자리인데, 그 자리를 그냥 차지하고 있을 수 없잖아요. 실력이 없어 보인다 싶으면 바로 한 달치 퇴직금 줘서 내보내는 거예요.”

자리를 지키려면 실력을, 아니 ‘비싼 판’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영한·한자 사전이나 기호가 가득한 수학·화학 교재가 돈을 많이 쳐줬다.

“영한사전 같은 거는요, 한 장에 글자가 많게는 1만 자나 들어가요.”

눈이 아플 정도로 작은 알파벳이 끝없이 이어진다. 2시간을 꼬박, 활자 조각을 철자에 맞춰 꾹꾹 눌러넣어야 한 판, 아니 한 장의 글이 만들어진다. 옥편(한자사전)의 경우, 가장 작은 크기의 활자가 필요한데 그 너비가 2㎜다. 말 그대로 깨알 같다. 손으로 잡힐 리 없으니 핀셋을 쥔다.

“식자를 하려면 손가락이 가늘어야 해요. 손 굵은 사람은 활자를 자꾸 떨어뜨리죠. 그럼 대우를 못 받아요.”

소년공이던 시절에는 얇디얇았을 테지만, 지금은 마디가 굵고 두꺼운 손이 눈에 들어온다. 가늘던 손가락이 세월 속에 퉁퉁해질 때까지 핀셋을 놓지 않았다.

“8시간 근무하고 4시간을 더 하면, 하루치를 더 줘요. 출근하면 이틀치 일당을 버는 셈이죠. 밤을 새우면, 3시간 근무마다 하루 일당을 줘요. 밤샘 근무를 하면 보통 닷새치를 가져가는 거예요. 교과서 만들고 이럴 때는 일이 많으니까. 한 달을 일하고 보통 석 달치를 가져가고 그랬어요. 괜찮았죠. 몸도 젊으니까 괜찮았어요.”

8시간 낮 근무에 4시간 잔업을 하고, 추가로 9시간 야간 노동을 하면 총 21시간. 그 대가로 5일치 품삯을 가져간다. 하루 일하고 닷새 일당을 번 것 같아 기뻤다. 젊었기에 몸 상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1970년대 들어 활판인쇄는 쇠락에 접어들었다. 파주 활판공방의 박한수 대표가 모은 활자들.

1970년대 들어 활판인쇄는 쇠락에 접어들었다. 파주 활판공방의 박한수 대표가 모은 활자들.

앉으면 일 못해요

원고를 읽고 활자를 찾아 활판에 놓는다. 이렇게만 보면 정적인 작업이지만, 사실 식자는 앉을 새도 없이 이뤄진다. 작업대에 자주 쓰는 단어 조합만 올려두는데도, 선반 꼭대기까지 활자가 들어찬다. 이 활자 배치를 기억하고 손에 익히는 것이 기능공의 자질이나, 기능이 높다고 다리가 안 아플 리 없다. 내내 서서 일했다.

“앉으면 일 못해요. 활자 찾을 때마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 작업량이 안 나오잖아요.”

시간이 귀해 동선을 최소화한다. 몸이 굳는다는 이야기다. 조명 아래 눈은 뻑뻑하고, 다리는 붓고, 핀셋 쥔 손이 뻣뻣해져도 하루 벌이를 계산하며 피로를 잊었다. “식자는 딸린 식구가 많아요.” 원고에 맞춰 활자를 골라오는 사람(문선공)과 견습공들까지. 식자공은 여러 사람의 일당을 책임진다. 원고 상태를 보고 자신이 시간당 몇 쪽을 짤 수 있는지 계산해 금액을 협상하는데, 약속된 시간을 지켜야 그 돈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놀아도 글자 짜는 사람은 놀면 안 돼요.”

말끝에 웃음이 따라붙는다. 무거운 책임감은 자부심이기도 했다. 식자공으로 살며, 유명 소설을 쓴 작가도 만나고 군부독재 시절 출판을 저항의 수단으로 삼던 지식인도 알고 지냈다. 고려문화사, 백영사, 민중서관 등 당대 굵직한 출판사들과도 일했다. 교복 한 벌 입은 적 없어도, 자신의 손을 거쳐간 작품들은 명성 높았다. 하지만 그보다 큰 자부심은 성실한 기능공인 자신에게서 나왔다. 어떤 세상이 올지 까맣게 모르던 때였다.

언젠가부터 출력 버튼을 누르면 초 단위로 인쇄물을 뽑아내는 기계가 나왔다. 더는 활자를 짜맞출 필요가 없었다. 6·25 전쟁통에도 인쇄소를 기웃거렸던 권용국씨였다. 인쇄소 작업대 앞에서 사계절을 보내고 이렇게 식자공으로 사나보다 하던 때, 전쟁이 났다. 피란길을 따라 똥지게도 지고, 딱지(암표)도 팔고, 슈보이(구두닦이)도 했다. 그 와중에도 활판을 직업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놓은 적 없었다. 휴전 소식에 서울로 돌아간 그는 인쇄소 문부터 두드렸다. 그런 그도 시대의 변화를 이길 수 없었다.

“그때는 이걸로 성공하자 했는데, 이렇게 일찍 없어질 줄 몰랐죠. 전부 전산으로 가니까. 말도 못하게 없어지는 거예요.”

당시 권용국씨는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자동화로 활판인쇄 주문량이 급감했다. 거래하던 출판사들도 줄줄이 문을 닫으니 사업이 휘청거렸다. 빚을 이고 외국으로 가 밤낮없이 일했다. “1990년에 갔다가 월드컵 할 때 왔어요.” 2000년대 한국은 더 가차 없이 달라져 있었고, 그는 활자 같은 것은 잊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고 했다. ‘활판공방’ 박한수 대표였다. 박 대표는 전국을 돌며 고물 취급받던 활판인쇄기와 주조기를 수집해, 2007년 활판공방을 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활판인쇄가 그렇게 부활했다. 공방은 현역에서 물러난 인쇄 기술자를 하나둘 수소문했고, 권용국씨는 조판대 앞에 서게 된다. 스무 해 만이었다.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반가웠죠.”

손이 활자 사이를 기민하게 움직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이 기억했다. 하지만 예전 같은 몸이 아니다. 이제 돋보기안경을 쓰고 활자를 찾는다. 기력도 다르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식자공만 수십 명에 다다르던 인쇄소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활판공방은 일흔이 훌쩍 넘은 인쇄공(김평진)과 아흔이 다 된 식자공이 지키고 있다. 실력을 시험하듯 빼곡하게 글자가 들어찬 원고가 아닌, 달력이나 시집 같은 여백이 많은 원고 작업을 한다. 견학 온 초등학생들에겐 사람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활판인쇄 시범도 보인다. 권용국씨도, 그의 활판도 세월 따라 여백이 늘었다.

윤동주의 시 ‘소년’이 활판으로 만들어져 한지에 찍혔다.

윤동주의 시 ‘소년’이 활판으로 만들어져 한지에 찍혔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이 일을 평생 해오셨잖아요. 돌아보니 어떠세요?” 큰 소리로 묻는다고 물었는데 그가 미소 짓는다. 들리지 않은 것이다. 다시 물을까 하다가 그의 표정이 담담해 보여 입을 다문다. 잠시 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가 있고 그러니까 꿈에 자꾸 나타나요. 젊어서 인쇄소에서 일하던 때가. 친구들도 그렇고…. 그때처럼 일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꿈이 되네요.”

젊은 혈기를 먹고사는 일에 바쳤다. 책 만드는 일이었다. 조용하다고 해도 공방은 미세한 소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주름진 손으로 돌같이 검은 활자를 차분히 쌓아올리는 그를 보자니, 일터가 고요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롯한 집중. 어쩐지 그 모습이 돌탑을 쌓는 것만 같았다. 차곡차곡 쌓아올려 완성을 이룬다. 세월의 풍파에 다소 허물어질지라도. 아흔 평생, 그의 삶도 이루었다.

글 희정 기록노동자·<두 번째 글쓰기> 저자, 사진 최형락

*베테랑의 몸: 기록노동자인 희정이 자신의 분야에서 숙련공(베테랑)으로 일해온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몸과 숙련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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