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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이 왔다면 눈에 마음을 맞춰야 한다

[카를 융] ‘중년의 위기’라는 말을 처음 만든 철학자… 나이에 걸맞은 삶을 받아들여라
등록 2023-12-22 12:11 수정 2023-12-27 00:10
카를 융은 ‘위기의 중년’에게 나이에 걸맞게 마음의 질서가 잡힌 성숙한 ‘세넥스’가 되라고 한다. 게티이미지

카를 융은 ‘위기의 중년’에게 나이에 걸맞게 마음의 질서가 잡힌 성숙한 ‘세넥스’가 되라고 한다. 게티이미지

사춘기에는 감정이 널뛴다. 갱년기를 겪는 중년도 다르지 않다. 내 마음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춘기에는 더 빨리 커지고 아름다워지며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허세’를 부린다. 중년들도 ‘센 척’하기는 비슷하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과 안 돌아가는 머리, 일터에서도 점차 밀려나는 상황, 늘어가는 뱃살과 빠지는 머리카락에 외모 자신감도 땅에 떨어질 터다. 처지가 이런데도 중년은 호기를 부리려 한다. 여전히 강한 척, 힘 있는 척하며 강짜를 부리고 충고를 늘어놓는다. 이들의 ‘꼰대질’에는 “나 아직 안 죽었거든!” 하는 절박한 호소가 숨어 있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노안이 왔다면 눈에 마음을 맞춰야 한다. 젊어지고 싶은 마음에 과욕을 부려봤자 사달만 날 뿐이다. 무엇보다 중년은 몸과 마음의 나이를 일치시키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이 점에서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큰 혜안을 안긴다. 그는 중년에게 “인생 전반기에 빛을 좇았다면, 후반기에는 마음속 그림자를 보듬어라”라고 충고한다. 무슨 말일까?

왜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싶을까?

먼저 우리는 나이에 걸맞은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젊어 보이려고 외모와 생활을 관리하는 중년이 적지 않다. 융은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려 애쓰는 생활에는 어릴 때의 욕망을 여전히 좇아도 된다고 허락(?)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고 꼬집는다. ‘푸에르 아이테르누스’(puer aeternus)는 ‘영원한 젊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피터 팬처럼 나이 먹지 않고 언제나 젊음을 누리기는 불가능하다. 푸에르 아이테르누스를 꿈꾸는 마음에는 언제나 불안이 꿈틀거린다. 결국은 늙고 약해져 주변으로 내몰린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계속 일러주는 탓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융은 우리에게 ‘세넥스’(senex)가 되라고 조언한다. 이는 마음의 질서가 잡힌 성숙한 사람을 말한다. 인생은 젊을 때만 아름답지 않다. 마흔은 마흔 살에, 오십은 오십 대에, 칠팔십 대에는 또 이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지 않던가. 인자하고 따뜻한 노인의 얼굴을 떠올려보라. 이 또한 파릇한 이십 대의 표정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오십 대에 침착하고 결연한 태도는 또 어떤가. 젊음이 사라졌어도, 우리는 삶의 어느 순간에도 멋질 수 있다. 그렇다면 중년 이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까?

카를 융은 중년에게 “인생 전반기에 빛을 좇았다면, 후반기에는 마음속 그림자를 보듬어라”라고 충고한다. 위키미디어 제공

카를 융은 중년에게 “인생 전반기에 빛을 좇았다면, 후반기에는 마음속 그림자를 보듬어라”라고 충고한다. 위키미디어 제공

페르소나와 그림자

융에 따르면, 인생은 죽을 때까지 성장해야 하는 과정이다. 인생 전반부에 우리는 빛을 좇는다. 능력을 키워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인정받으려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시기를 겪는 사람들은 좋은 페르소나(persona)에 목을 맨다. 이는 심리학에서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의미한다. 의사나 판검사같이 잘나가는 페르소나를 갖췄을 때와, ‘일없는 동네 청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를 견줘보라. 전반부가 인생의 빛을 좇는 시기라는 융의 설명이 금방 다가올 테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페르소나를 갖췄어도 마음속 불안과 초조, 헛헛함은 좀처럼 스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젊고 의욕이 넘치는 시기에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태양이 정오를 향해 올라갈 때는 그림자도 짧아지기 때문이다. 반면 오후가 되어 해가 서녘으로 향할 때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다. 높은 지위와 많은 연봉을 누린다고 해서 꼭 행복할까? 사람들은 나의 돈과 자리를 보고 나에게 살가울 뿐이다. 내가 이를 잃는 순간 세상은 차갑게 나를 내쳐버릴 터다. 그래서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지려 애쓴다. 그렇지만 중년에 이르면 자신이 언제까지나 절박하게 달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체력과 정신도 나날이 시들고 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까닭이다.

개인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

그렇다면 인생의 오후를 지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보다 빛을 좇느라 외면하며 지우려 했던 마음속 그림자를 보듬어야 한다. 중년에 이르면 몸부터 그림자가 드러나는 상태로 바뀌어간다. 이 시기에 남자들은 튼실했던 몸매가 흐트러지고 마음도 약해진다. 자기 안의 여성성이 올라온다는 신호다. 반면 화를 참지 못하고 성격 급해지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들 안에 남성성이 튀어나온다는 신호다. 융은 이를 나쁘게 여기지 말라고 조언한다.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다. 여기에 맞춰 삶의 태도를 조율(tuning)하면 된다. 중년에 마음이 약해진다며 걱정하지 말라. 오히려 섬세해지는 감성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거칠고 억세지는 자기 모습에 어깨를 늘어뜨릴 이유도 없다. 이제 나는 세상에 겁 없이 맞서는 용사로 거듭나고 있을 따름이다.

빛을 좇던 인생 전반부에는 자신을 누르며 스스로를 길들여야 했다. 좋은 페르소나를 쓰려면, 높은 지위에서 괜찮은 역할을 하려면 세상이 바라는 모습대로 움직여야 했던 탓이다. 내 감정과 욕망은 억누르고 상처와 약점도 애써 감춰야 했다. 이랬던 처지가 과연 나를 나답게 만드는 삶이었다 할 만할까? 오히려 개성을 지우며 사회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부품으로 자기를 잃어가는 과정 아니었을까? 성공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삶의 후반부에는 애써 감추고 누르려 했던 마음속 그림자를 챙겨줘야 한다. 이를 융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 ‘개인화’(individualization)라고 부른다. 사회적 체면은 이제 내려놓아도 된다. 사회에서 내 역할이 사라져도, 나를 중요하게 떠받드는 시선이 없다 해도, 평온한 마음으로 누리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중년의 하루는 외롭고 쓸쓸하다. 이제는 더 많이 누리고 더 높이 올라간다고 고독과 허무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되레 잃을 것이 많아질수록 불안감만 높아질 뿐이다. 그렇다면 별스럽지 않은 주제로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관계를 트는 방법을 익혀보라. 성공을 좇느라 건강을 내버려두었다면, 건강과 편안함을 느끼게끔 방치했던 몸을 제대로 가꿔보라. 이럴 때 후반기 인생은 좋은 삶의 완성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융은 ‘진정한 치유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젊고 잘나가던 시절처럼 살려 하면 어떻게 될까? ‘불쌍한 나 증후군’(poor me syndrome)에 빠져들 뿐이다. 기울어진 처지를 한탄하며 하릴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일상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버텨라, 아픔이 성장통이 될 때까지

물론 그림자를 보듬기는 절대 쉽지 않다. 젊은 날, 우리는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품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융은 ‘중년의 위기’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아픔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 통증을 못 느끼는 상태가 최악이다. 고통은 삶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일깨우는 신호일 따름이다. 그러니 중년에 겪는 소외감과 섭섭함, 외로움과 허무함을 영웅적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를 못 견디고 도망쳐서는 인생 후반기 성장은 없다. 중년에 스미는 가슴속 찬바람이 힘들어서 불륜에 빠지거나 삿된 유혹에 시달리는 인생들을 보라. 그들은 ‘푸에르 아이테르누스’에 여전히 휘둘리며 인생의 진도를 거꾸로 나아가고 있다.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전술도 달라져야 한다. 전반기에 사랑과 성공을 얻기 위해 했던 방식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제는 내 마음을 다독이고 정상에서 내려가며 등반 전 과정을 오롯이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다.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융은 중년기 특유의 힘듦을 애써 버텨내며 의미를 찾으라 격려한다. 이 말을 듣고 반감이 드는 중년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기 인생이 내내 비극이었다면, 후반기 인생도 계속 신산스러우란 말인가? 여기에 융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듯싶다. 아픔을 영웅적으로 이겨내는 비극의 주인공은 희극의 주연배우보다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대의 상처들을 훌륭하게 껴안으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후반기 인생은 성공한 자보다 훨씬 빛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중년은 용기를 내야 한다. 삶의 모든 고통은 성장통으로 바뀔 수 있다. 중년의 위기를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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