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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보다 잘 지는 법을 찾아야 하는 나이

죽음에 내어줄 것이 거의 없도록… 38살에 은퇴했지만 인생 후반부에 세상이 더 많이 찾은 철학자 몽테뉴
등록 2024-03-29 13:32 수정 2024-04-04 02:17
철학자 몽테뉴는 38살에 판사에서 은퇴해 인생 후반전을 일찍 시작했다. 몽테뉴 초상화. 위키미디어

철학자 몽테뉴는 38살에 판사에서 은퇴해 인생 후반전을 일찍 시작했다. 몽테뉴 초상화. 위키미디어


어느덧 경기는 후반에 접어들었다. 조금씩 체력이 떨어지고 호흡도 버거워진다. 상대는 젊고 강하다. 겨루기에 조금 힘이 부치지만 아직은 할 만하다. 백전노장인 나에게는 노련함이 있지 않던가. 뒤지고 있어도 언제든 판세는 뒤집힐 터다. 나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경기는 좀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예전 승리의 기억으로 마음만 조급해질 뿐이다.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나에게는 여전히 힘이 남아 있다. 기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은퇴 뒤 고향의 자기 서재로

중년의 위기를 겪는 이들의 마음은 이와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 “깨끗하게 자리에서 물러나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자기 경력이 기울고 있음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밀려날 때까지 경기장에서 질척대곤 한다. 그러나 빨리 패배하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밀려오는 까닭이다. 경기장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시합에 더는 나가지 못한다 해도 나에게는 여전히 긴 세월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승패에만 치열했던 나는 경기 밖에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모른다. 이런 깨달음이 빨리 찾아들수록 인생 전체로는 좋다. 인생의 정점을 지난 중년은 이기기보다 잘 져야 하는 나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물음에 몽테뉴(1533~1592)는 혜안을 안긴다. 그는 법원 판사로서 한창 경력을 쌓을 38살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향의 자기 서재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스무 살 때의 지혜가 인생 후반부에도 통하리라는 법은 없다. 스무 살은 인생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시기다. 반면 중년은 삶의 꼭대기를 지나 끝을 향해 내려가야 하는 때다. 오르막길을 오르듯 내리막길을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대는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무덤 생각은 안 하고, 대리석을 깎아 집을 짓고 있다.” 몽테뉴의 말이다. 인생 전반에 몸에 밴 관성대로 후반부 삶을 가꾸지 말라는 의미다. 몽테뉴는 30대 후반에 사회생활이라는 경기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몽테뉴의 선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이 많을 듯싶다. 아직 한창인 나이, 노력하면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도 더 많이 벌겠다. 그런데도 왜 이리 급하게 기회를 놓아버린단 말인가!

몽테뉴라면 이런 지적에 담담하게 답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중년에 이르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다. 그래서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질수록 마음만 더 초조하고 불안해질 뿐이다. 이 모두를 놓아버리고 무(無)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탓이다. 잃을 것이 많으면 슬픔과 고통만 커지는 법, 삶을 마칠 때 죽음에 내어줄 것이 거의 없게 하는 편이 남는 장사다! 이쯤 되면 왜 그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 자유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는지 이해될 듯싶다. 삶의 내리막에서는 연착륙이 목표여야 한다. 그러니 마음을 비워라!

자기를 가꾸는 가장 위대한 기술

그렇다면 몽테뉴는 어떻게 후반부 인생을 가꾸었을까?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중년 생활을 이렇게 들려준다.

“젊었을 때 나는 과시하려고 읽었다. 좀더 나이 먹어서는 지혜로워지고자 읽었다. 지금 나는 그냥 즐기기 위해 읽을 뿐이다.”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내가 아닌 것들로 채워졌다.

이제 ‘인생의 끝부분’만큼은 나를 위한 것들로 채워져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가를 누리며 일상을 즐기는 법을 익히기란 일을 배우기만큼이나 어렵다. 허허로움을 이기지 못해 다시 일자리를 찾는 퇴직자가 드물지 않은 이유다. 몽테뉴도 역시 호기롭게 일터를 박차고 나왔지만, 처음에는 오롯이 자기 시간을 가꾸기가 쉽지 않았다. 공직에 있을 때는 큰 문제들을 다루느라 괴로웠다. 일에서 완전히 놓여난 뒤에는 일상의 자잘하고 소소한 문제들이 크게 다가올 터다. 가족 간의 소소한 다툼이 직장에서의 커다란 갈등만큼이나 마음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몽테뉴는 ‘자기를 지키는 가장 위대한 기술’(le plus grand art)을 소소한 일상을 잘 가꾸는 데부터 찾아나갔다.

“아내나 하인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집안사람들에게 감탄의 대상인 이들도 거의 없다. 자기 집이나 고향 마을에서 예언자 노릇을 하는 자는 없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실이다.”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이는 지위나 권력이 없어도 존경받는다. 그렇다면 중년인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 몽테뉴는 이렇게도 충고한다. “얼마나 좋은 말(馬)인지는 승마장에서 달릴 때뿐 아니라 천천히 걷거나 마구간에서 쉬고 있는 모습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 모습에서도 따뜻함과 존경심이 느껴진다. 중년에 이른 나는 하루하루를 이런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몽테뉴는 자신을 가꾸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렇게 쓴 책이 <에세>(수상록)다.

몽테뉴는 자신을 가꾸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렇게 쓴 책이 <에세>(수상록)다.


책을 통해 ‘자기만의 성채’를 갖추라 

나아가, 몽테뉴는 ‘자기만의 뒷방’을 만들라고 속삭인다. 중년은 홀로 있음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나이다. 고독이 두려울 때 우리는 온갖 세상 소음 속으로 다시 뛰어든다. “사람들은 온갖 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일자리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몽테뉴가 한숨을 쉬며 하는 말이다. 무료함에 지쳐 사람을 찾아 나서기에 또다시 이러저러한 뒷말, 평가와 시선에 휩싸여 감정노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자신의 영혼을 친구 삼으라”고 충고한다. 몽테뉴는 은퇴 후 시간 대부분을 ‘자기만의 뒷방’인 서가에서 홀로 보냈다. 지금도 도서관에서 홀로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보내는 중년들이 종종 눈에 띈다. 고독에서 지혜를 길어낼 줄 아는 분들이라 하겠다.

물론 홀로 지내는 생활만으로 일상이 가치 있고 훌륭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몽테뉴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순전히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을 묘사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은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머리를 빗고 몸단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끊임없이 나를 가꾼다.”

몽테뉴의 유명한 <수상록>, 즉 에세(Essai)는 이런 목적으로 쓰였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게 되지 않던가. 자기를 가꾸기 위한 글쓰기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는 몽테뉴보다 훨씬 좋은 처지에 있다. 블로그나 카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내보이기 좋은 공간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렇지만 온종일 정치나 연예 기사에 댓글을 달며 보내는 생활은 몽테뉴식의 자기를 가꾸는 법과 거리가 멀다. 이는 세상의 소음에 휩싸여 감정을 불끈거리느라 되레 자신을 잃어버리게 할 따름이다. 몽테뉴는 세상일을 놓아버린 채 고독하게 자기 자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는 세상일이 아니라 책들이 논의 상대이자 벗이었다.

몽테뉴는 이렇게도 말한다. “책은 언제나 대기 상태인 벗이다.” 외롭고 힘들 때 언제든 똑같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아주는 친구는 소중하다. 책이 바로 그렇다. 견디기 힘든 무료한 외로움을 덜어줄뿐더러 언제나 기꺼이 나를 맞아준다. 이런 우정을 갖춘 사람은 든든한 마음으로 세상을 담담하게 헤쳐갈 수 있다. 이 점에서 독서에 익숙한 사람은 책을 통해 ‘자기만의 성채’(Zitadelle)를 갖추게 된 셈이다.

세상에서 물러선 몽테뉴는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수상록>에는 고전에서 따온 인용구로 가득하다. 청춘은 아름답다. 싱싱한 감정과 육체의 매력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하지만 중년은 날것이어서는 안 된다. 감정을 지성으로 다듬고 육체도 무너지지 않게 가꿀 때만 비로소 아름답다. 인생 후반부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살아지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즐기고, 그것도 품위 있게 즐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의 깊게 가꾸어야 한다.

물러섬이 되레 승리하는 길 

몽테뉴는 일찌감치 은퇴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세상은 그를 간절하게 찾았다. 왜 그랬을까? 변화가 빠른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생각을 원한다. 오랜 종교전쟁 끝에 화해와 타협이 필요해지자 대결의 시대에는 없던 남다른 정신이 필요했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지혜를 쌓던 몽테뉴는 이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태공은 빈 낚싯대를 강물에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 몽테뉴가 자신의 서재에서 보낸 시간 또한 그러했으리라. 게다가 영혼의 성채를 갖춘 몽테뉴에게는 더는 세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계가 그를 간절히 원했을 따름이다. 이렇듯 중년에는 물러섬이 되레 승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중년의 그대여, 이기려 하지 말라. 오히려 좋은 생활과 사색, 그리고 독서로 영혼을 위한 굳건한 성을 쌓으면 좋겠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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