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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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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귀에서 슉슉 소리가 들렸다

이명을 소수자의 비명으로 재해석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등록 2024-01-20 05:31 수정 2024-01-24 09:44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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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버거워 픽션의 세계로라도 도망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가벼운 소설을 찾는다. 도무지 기승전결이란 걸 찾아보기 어려운, 답답한 현실 걱정을 자제시켜줄 도구가 간절해서다.

반대로 이열치열 독서법이 더 효과적인 처방이 될 때도 있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도,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안내하는 ‘좋은 책’을 만난다면 말이다. 처방의 관건이 얼마나 좋은 책을 만나느냐에 있다면, 이문영의 장편소설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위즈덤하우스 펴냄)는 추천 순위 상위에 오를 만하다.

지은이는 <한겨레> 기자다. 소설의 주인공 조이섶도 기자다. 조이섶은 이명을 겪으며 세계가 둘로 나뉘는 경험을 한다. 두 세계는 “현실의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와 이명이 목구멍을 열고 이야기를 게워 올리는 세계”다. 조이섶은 귀울음(이명)으로 시끄러운 잡음에 에워싸이지만, 이 소음이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의 비명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쌍용자동차·스타케미칼 정리해고 노동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이자 성소수자인 활동가, 무연고 사망자 등을 연상시키는 일화가 이어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는 모두 이 시대에 ‘잘 안 팔리는’ 기사 소재다.

그래서 이명은 기자의 ‘직업병’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 흘리는 소리들이 귀에 대고 이야기를 슉슉 뱉었다. 내가 잘라버린 이야기들. 취재하고도 잊어버린 이야기들. 한 번 스치듯 쓴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며 만족한 이야기들. 쓸 만큼 썼으니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며 합리화한 이야기들. 너무 무거워 독자들이 싫어한다며 알아서 회피한 이야기들.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자는 이야기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이야기들.” 이명은 묻고, 듣고, 쓰는 일이 직업인 조 기자 스스로의 비명이기도 한 셈이다.


기승전결이 흐린 소설은 ‘야마’ 없는 기사와 닮았다. ‘야마’란 기사의 주제를 일컫는 한국 언론계 은어로, 사실보다 주장이나 이해관계를 앞세우게 해서 한국 언론의 발전을 가로막는 관행 중 하나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소설은 ‘얘기 안 되는’ 야마라고 누락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소설에서 이명은 “이 세계가 잃어버린 소리들이 소멸되지 않으려고 간절하게 붙든 최후의 마이크”로 재/의미화된다. 당신이 ‘픽션보다 현실이 더 기막히고 충격적이며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그럼에도 언론이 한가롭게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데 시간 낭비 중이라는 사실을 꿰뚫은 독자라면 분명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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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난시대를 살아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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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매일 기후변화 피해 뉴스를 접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1989년 환경과공해연구회를 창립하며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지은이는, 기후변화를 감당하기 위한 방안으로 산업구조조정과 지역균형발전이 시급함을 주장한다. 경제·지역 양극화의 누적이 심각해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과 보고서 22권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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