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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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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이 정답일까

집밥이 정신 건강, 몸 건강에 좋고 경제적으로 저렴해 더 이득이라는 이들에게
등록 2021-10-07 14:48 수정 2021-10-08 02:08
음식을 앞에 둔 아이의 기뻐하는 얼굴. 아이는 부모가 정성 들여 만든 이유식보다 식당에서 조금 덜어준 우동 가닥에 더 기쁜 표정을 짓더군요. 그래요, 아무거나 골고루 잘 먹고 잘 커주면 그게 중요하겠죠.

음식을 앞에 둔 아이의 기뻐하는 얼굴. 아이는 부모가 정성 들여 만든 이유식보다 식당에서 조금 덜어준 우동 가닥에 더 기쁜 표정을 짓더군요. 그래요, 아무거나 골고루 잘 먹고 잘 커주면 그게 중요하겠죠.

마스크 없이는 문밖으로 나서기가 어색하고 누군가의 맨얼굴을 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은 활기차게 느껴지기보다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곳 같아 움츠러들고, 여럿이 모여야 하는 회의나 대규모 강의는 온라인으로 하는 것이 더 익숙합니다. 그저 한두 달, 길어야 두어 계절이면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가 2년에 육박하면서, 한때는 ‘비상’이던 상황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돌밥’에 돌아버리겠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일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 ‘밥’입니다. 요즘 저를 포함해 또래 친구들 중에는 ‘돌밥’에 한숨 쉬는 이가 많습니다. 돌밥이란 돌이 씹히는 밥이 아니라, ‘돌아서면 또 밥때’의 줄임말입니다. 출근과 등교가 당연하던 시기, 최소한 점심 한 끼는 밖에서 챙겨주어 신경 쓰지 않아도 됐습니다. 학교에서는 급식이 나왔고,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이름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휴식 시간이었으니까요. 아침은 시간이 부족해서, 저녁은 다른 이벤트들로 분산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런데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학교와 직장의 기능이 집으로 넘어오자, 매 식사를 챙기는 의무 역시 집으로 넘어왔습니다. 음식이 다 조리되어 등장하면 그제야 식탁 앞에 앉기만 해도 되는 이들에게는 그저 식판과 식당의 공용 식기가 익숙한 그릇들로 바뀌는 것뿐이겠지만, 식재료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밥상을 차려내고 치우는 일까지 해야 하는 이들(물론 전자와 후자는 겹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에게는 노동의 사이클이 더 빨라지고 잦아졌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고 먹고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는 데는 최소 두세 시간이 걸립니다. 대개 끼니 사이 간격은 대여섯 시간이고, 아이들이 있다면 사이사이 간식도 필수이니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밥때’라는 느낌에 답답해집니다.

특히 돌밥에 대한 스트레스는 아이가 있는 집의 부모(주로 엄마 쪽)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다. 나 혼자 산다면 혹은 성인끼리만 산다면 각자 스케줄에 따라 알아서 먹고 치우라고 할 수 있고, 한두 끼는 대충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이들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에게는 영양소가 골고루 든 맛도 좋고 모양도 좋은 것만 먹이고 싶은데, 이른바 제대로 된 집밥을 차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루 세 번, 간식까지 챙겨서 말이죠. 게다가 연일 언론을 오르내리는 ‘집밥 예찬론’까지 더해지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밥상 차리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있는 아이의 끼니를 대충 눙치거나 간편식이나 배달 음식을 먹이는 건 어쩐지 마음에 걸립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먹는 행위가, 혹은 누군가에게 먹이는 행위가 이토록 부담스럽다는 것이 말입니다. 옛말에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된 이후, 이 말이 주는 행복감이 뭔지 알았습니다. 실컷 젖을 먹은 아이가 배부른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을 때, 처음 먹어본 음식 맛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랄 때, 제 몫으로 시켜준 키즈 메뉴 한 상 차림에 뿌듯해하며 꽤 많은 양을 먹고 스스로도 신기해할 때 부모는 더없이 흐뭇하고 대견합니다. 제게도 그런 기억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식이 먹는 모습 보는 게 왜 그토록 행복하고 기쁜 일일까요?

집밥에는 영양적 가치보다 큰 게 있다?

생물학적으로 먹는다는 행위는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낼 수 없는 종속영양생물의 일종인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살아남는 것을 배워야 하는 어린 개체가 생존을 위해 갖춰야 하는 최초의 능력이랄 수 있습니다. 또한 유전자의 복제 열망에 본능적으로 지배받고 있는 생존기계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공유하는 존재가 잘 먹고 또한 잘 먹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유전자 사본의 복제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지표가 될 터이고요. 하지만 이런 생물학적 기능이 전면으로 드러나면 이 행위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효율성만 추구하려고 할 테니, 이는 더없는 귀여움과 가슴 벅찬 흐뭇함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포장되어 평생의 행복한 순간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행위를 지속할 테니 말입니다. 유전자의 생존 본능이란 그렇게 효율적이고도 치밀한 것이죠.

이런 환상을 들춰내고 본다면, 객관적으로 음식이란 생물체의 생존에 꼭 필요한 영양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충분한 양이 제공되며, 이물질에 오염되거나 변질되지 않아 건강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없고, 소화가 잘되어 위장관에 무리를 주지 않으며, 음식의 맛이나 향, 질감 등이 도저히 먹지 못할 만큼 고약하지만 않다면, 일단은 합격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좋은’ 음식의 전부는 당연히 아닙니다.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환자용 유동식입니다. 모든 필수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으며 소화기관에 부담도 적고 위생적이니까요. 하지만 평소에 이를 매일 먹는 이들이라 해도, 몸이 받아들여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이를 포기하고 다른 음식을 선택할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저 오랜 세월 전, 움집에 둘러앉아 화덕의 음식을 나눠 먹던 시절부터 음식에는 단지 영양 공급원이라는 물리적 기능 외에도 다른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요. 음식에 대한 호불호는 식재료와 결과물의 맛과 향, 질감과 온도, 색감과 모양, 식기의 종류와 모양과 음식 플레이팅, 식재료에 대한 종교적 신념과 가치관, 함께 먹는 이들과의 관계와 테이블 매너, 주변 환경과 분위기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기에 ‘집밥’이라는 말까지 더해지면, 음식이 만들어지는 공간의 특수성과 음식을 만드는 이의 사랑과 정성이라는 무형적 가치도 추가됩니다. 만드는 이의 정성과 사랑이 듬뿍 들어간 음식이라면 원래 그 음식이 가진 영양학적 가치보다 큰 양분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플러스알파까지 더해지는 것이죠.

식재료와 가사 노동이 공짜도 아닌데

문제는 그 플러스알파가 당연한 것이 되면서부터 발생합니다. 플러스알파란, 어디까지나 가외로 더해지는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종종 집밥 예찬론을 부르짖는 이들 중에는, 집밥에 담긴 정성과 사랑을 넘어 또 다른 플러스알파까지 더합니다. 사먹는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은 식재료비 절감을 위해 더 싼 재료를 쓰고, 미각을 자극하려고 설탕과 소금과 향신료를 과다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면 내 가족을 위해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자극적인 조미료 사용을 줄이니 몸에 더 좋을 것이라는 기능적 의미에, 집밥은 외식비보다 싸게 든다는 경제적 이유까지 더하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과 상상은 공짜여도, 식재료와 가사 노동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더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싶지만 식비의 압박을 느끼는 이도 있을 테고, 요리에 더 공들이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 이도 있습니다. 때로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산 식재료의 원가조차 같은 음식을 1∼2인분 사먹는 값보다 많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밥이 정신 건강뿐 아니라 몸 건강에도 좋고 집안의 경제적 건실함에도 더 좋다는 막연한 선입관이 덧칠되는 순간, 집에서 음식을 해 먹이는 이들이 느끼는 부담은 이중 삼중으로 배가됩니다.

분자 단위로 쪼개진 음식의 출신은 중요치 않다

다시 한번, 음식의 본질로 돌아가볼까요? 음식은 기본적으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와 양분을 보충해줍니다. 그리고 음식은 우리 몸에 흡수되기 전 ‘소화’라는 과정을 통해 매우 잘게 쪼개져 탄수화물은 포도당으로,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으로,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쪼개져야 흡수됩니다.

이렇게 분자 단위로 쪼개진 물질은 애초의 출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햅쌀로 갓 지은 쌀밥에서 온 포도당이든, 카페라테 위 잔뜩 얹힌 크림에서 온 포도당이든 모두 똑같은 포도당일 뿐입니다. 이때 중요한 건 우리 몸에서 필요한 포도당 개수와의 균형입니다. 몸이 요구하는 포도당은 많은데 섭취량이 적으면 기운이 빠지고 힘이 나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라면 남는 포도당은 지방으로 전환되어 배나 엉덩이, 내장 사이사이에 남겠지요. 단백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콜라겐이 풍부한 돼지 껍질을 먹는다고 그것이 내 피부 사이에 스며들어 주름을 채워주진 않습니다. 이는 모두 소화 과정을 통해 아미노산 수준으로 분해된 뒤 흡수되고, 다시 결합해 콜라겐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콜라겐 합성에 이용되는 아미노산은 먹어서 흡수해야만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아니라, 우리 몸의 세포 내 시스템이 합성 가능한 비필수 아미노산입니다. 필수 아미노산은 우리 몸에 중요하고 비필수 아미노산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비필수 아미노산은 체내에서 충분히 합성하기에 음식으로 섭취할 필요가 없지만, 필수 아미노산은 체내 합성이 되지 않아 반드시 음식으로 섭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콜라겐의 경우, 이를 구성하는 아미노산 성분을 따로 먹지 않아도 다른 재료만 충분하다면 체내에서 합성 가능하다는 것이죠. 어차피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될 것이니 그 원재료가 쇠고기든 달걀이든 콩이든 상관없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양입니다. 그저 20종의 아미노산 중 체내 합성량이 부족한 8종(어린이의 경우 10종)이 골고루 들어 있고, 체내에서 필요한 양만큼만 섭취하면 되는 것이죠.

음식에는 정답이 없다

코로나 이후 집밥을 먹는 경우는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비만과 영양 불균형 걱정을 합니다. 집밥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찌며, 영양소란 고심하지 않으면 늘 빠지는 것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깨끗하고 입에 맞고 영양소가 골고루 든 음식을 편안한 분위기에 ‘적절한 양’만 먹는다면, 그것이 집에서 직접 요리한 것이든 조리된 것을 사먹는 것이든 밀키트로 배송된 식재료를 끓이기만 하는 것이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필요량을 넘어 너무 많이 먹는 것과 불편한 마음을 함께 먹는(혹은 먹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음식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저 음식일 뿐이기도 합니다. <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고 주장하는 저자 정재훈 약사의 말처럼, 음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먹는 이가 즐겁고 하는 이도 즐겁고,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골고루 적당히 먹는 것이 유일한 미덕일 뿐이죠.

글·사진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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