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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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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지 않고 반대하는 정치

양대 정당은 점점 더 적대적으로… 상대 증오와 붙어 있는 정치적 사랑
등록 2022-03-14 18:41 수정 2022-03-15 02: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세영의 질문
이번 대선에서 양대 정당의 후보자와 지지층은 경쟁 정당에 대해 극한의 불신과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어느 정도이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정치에서 분노와 증오란 무엇이며, 사랑과 관용이란 대체 무엇인가?(제1402호)

역대급 초박빙 선거라던 20대 대선이 마침내 끝나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 직전까지 여론조사마다 결과가 갈렸고 심지어 출구조사로도 승차를 예측할 수 없었으니 대단한 경합이었음이 틀림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만들어갈 세상을 꿈꿨던 유권자는 슬픔과 탄식이 깊을 것이고,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는 덩실덩실 춤췄다.

진영의 거리는 멀어지고, 지지층 내부는 좁혀지고

그러나 정치적 사랑은 또한, 종종, 증오와 붙어 있다. 이번 선거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고 불렸다. 지지 후보가 없는 유권자가 유독 많았고 지지층조차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반대하는 후보와 정치인에 대한 미움과 그들의 집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번 대선 투표율(77.1%)이 꽤 높았던 것은, 와야 할 세상에 대한 열망보다는 와서는 안 될 세상을 막으려는 동기가 더 컸을 것이다.

이런 사랑과 증오의 공존은 구조적 토대가 있다. 비록 양대 정당은 상대 후보에 대한 개인적 비방에 몰두했지만, 선거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쟁점에서 가치와 담론의 균열이 날카롭게 형성됐다. 한쪽엔 평등과 복지, 페미니즘, 평화 외교가, 반대쪽엔 능력주의, 반페미니즘, 멸공혐중 외교가 거울상처럼 대립했다. 한쪽 후보를 믿지 않는 사람도, 반대쪽 후보를 증오하기엔 충분했다.

이러한 대립의 정치는 이번 대선에만 나타난 특별한 현상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양대 정당은 점점 더 상호 적대적이 되어왔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승리,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념대립과 정치 대결이 더욱 깊고 견고해졌다.

범진보와 범보수의 팽팽한 대치는 장기 현상이다. 2012년 문재인, 박근혜 후보는 각각 48.0%, 51.6%를 얻었고, 2017년 문재인·심상정 후보의 득표율 합계는 47.3%, 홍준표·유승민·안철수의 합계는 52.2%였다. 이번에 이재명·심상정의 합계는 50.2%, 안철수와 단일화한 윤석열 후보는 48.6%였다. 안철수 지지층 일부가 이재명 후보 지지로 넘어왔음을 고려하면, 힘의 균형이 놀랍게 지속된 것이다.

이런 균열 구조의 공고화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권자까지 관통한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2007년, 2012년, 2017년 대선을 분석한 결과, 양대 정당 지지자들 간의 이념적 양극화가 뚜렷해진 추이를 확인했다. 즉 민주당 지지층은 점점 더 진보화했고 보수정당 지지층은 점점 더 보수화해 양 진영의 거리가 멀어진 반면, 지지층 내부의 이념적 거리는 좁혀졌다.

협의민주주의, 양극적 균열 위에 있어

이념적 양극화, 의견의 양극화뿐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에 대한 애정, 그리고 반대 정당 혹은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는 정서적 양극화도 깊어졌다. 이승윤·이유진·신진욱이 2021년 수행한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무려 90%가 ‘내가 싫어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행태에 개인적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 결과였다.

특히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유권자일수록 대내적 결속과 반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각별히 크다. 하상응 서강대 교수와 길정아 고려대 박사는 최근 연구에서, 정치 고관심층일수록 보수파는 보수정권만 신뢰하고 진보파는 진보정권만 신뢰하는 이념적 편향이 강함을 밝혀냈다.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은 민주주의의 생명이지만, 진영 대립의 격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념성이 뚜렷한 유권자는 대내적 결속뿐 아니라 대외적 적대감도 강하다. 장승진 국민대 교수와 서강대 서정규의 연구는, 일관되고 강한 진보 또는 보수 성향의 유권자일수록 자신이 반대하는 정당에 강한 반감을 보이는 부정적 당파심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대 정당에 대한 적대감과 지지 정당에 대한 일체감은 별개의 정치 감정이지만 양자는 서로를 강화할 수 있다.

이런 대립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 더 악화됐을까? 정동준 서울대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시민 전체로 봤을 때는 양극화가 심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당파적 지지자들 사이에선 대내적 동질성과 반대 세력에 대한 적대감이 탄핵 이후 더 커졌다. 나아가 반대 정당에 대한 반감이 지지 정당에 대한 호감보다 투표 행위에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많고 이념 성향이 뚜렷한 유권자층의 집단적 결속과 대립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소수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통계를 보면, 총인구 중 당원은 2009년 8%에 불과했지만 10년 뒤인 2019년 17%에 이르렀고 이 중에서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이 20%다. 의식적이고 조직된 시민들이 여론과 정당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변화의 함의는 무엇일까? 정치의식이 높은 시민층이 확대되고 집단화된 균열을 형성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시민들이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명확히 하고, 지향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우리의 공적인 무대를 활기차게 한다. 심지어 양극화도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갈등이 산만하면 협상도 어렵다. 많은 협의민주주의 체제가 양극적 균열 위에 서 있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공존 불가능성

문제는 반대편을 악하고 추한 존재로, 자기편을 선하고 숭고한 집단으로 도덕화하고 미학화하는 행동과 그 저변의 신념체계다. 반대 진영은 미움·혐오·분노·역겨움의 대상이 되며, 정치의 목적은 갈등 조정이 아니라 적의 절멸에 있게 된다. ‘그들’은 용납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된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학자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지금 미국에서 자기가 반대하는 정당을 그냥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양당 지지층의 절반이 넘으며, 이들의 적대감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심각하게 제기된다고 말한다.

많은 나라에서 종교 차이에 의한 갈등은 순화된 반면, 정치적 신념 차이에 따른 공존 불가능성은 깊어졌다. 가족, 연인, 친구 간에 지지 정당이나 정치 현안에 대한 관점이 다를 때 관계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정치적 사랑의 대상이 상충할 때 가족애와 우정, 에로틱한 사랑도 흔들린다. 정치적 신념과 태도를 공유할 수 있느냐가 사적 친밀성보다 더 중요하거나, 그것의 전제가 된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알려진 대로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특성을 ‘친구와 적’의 구분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 말은 종종 정치가 본질적으로 증오하고 파멸하는 적대적 투쟁이라는 의미로 오해된다. 하지만 슈미트는 정치에서 ‘친구와 적’의 범주가 도덕적인 선과 악, 미적인 아름다움과 추함, 감정적인 사랑과 미움의 범주와 구분되는 특질임을 명확히 했다.

‘친구와 적’이라는 범주의 핵심은, 공적인 관심사를 놓고 사람들이 집단으로 결합하고 다른 집단과 분리되는 것, 대내적으로 결속하고 대외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가리킨다. 슈미트는 이러한 집단 형성과 균열 형성의 본질이 심리적·감정적·도덕적 적대에 있지 않음에 따라, 정치에서 ‘적’(Feind)이란 증오하는 ‘적대자’(Gegner)와 다른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의 현실에서 ‘친구와 적’의 관계는 흔히 감정적·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진다. 뜨거운 감동, 간절한 소망, 격앙된 분노가 없는 정치는 승리하기 어렵다. 왜일까? 마사 누스바움이 말했듯, 공동체에 대한 사랑 없이는 헌신의 동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친구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적과의 대결이 잔혹해진다는 것이다.

통합의 호소 못지않게 ‘잘 싸우는 법’을 찾아가자

누스바움이 말한 ‘정치적 감정의 야누스적 속성’, 즉 사랑과 증오, 포괄과 배제, 헌신과 냉정이 동일한 행위 안에 공존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우리 사회 저변의 많은 갈등과 분노가 분출돼 치열하게 격돌했던 과정이 0.73%포인트 차이로 결판이 난 지금, 통합의 호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잘 싸우는 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증오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고 반대하는 법, 분노보다 강하고 미래지향적인 동기로 정의를 추구하는 법, 거기에서 비로소 자신을 성찰하고 혁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날 것이라 믿는다. 윤석열 당선자가 노동과 평화,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그간 내뱉었던 말이 이제 대통령의 정치로 실현될 때, 우리는 진실로 이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이번 대선 개표 결과에서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확연히 다른 영호남의 투표 성향이다. 혹자는 지역 구도의 부활을 말한다. 지역주의 투표 행태는 왜 지속되는가. 그것은 사라져야 할 병리적 현상인가. (제1407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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