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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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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유인촌이 제일 멀쩡해 보이다니

‘법알못’ 대법원장 후보, 쿠데타 미화하는 국방부 장관 후보, 엑시트하겠다는 여가부 장관 후보 덕분에
등록 2023-09-22 13:12 수정 2023-09-24 14:14
윤석열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국방부·여성가족부 장관을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한 2023년 9월13일 유인촌, 김행, 신원식(왼쪽부터) 후보자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브리핑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국방부·여성가족부 장관을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한 2023년 9월13일 유인촌, 김행, 신원식(왼쪽부터) 후보자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브리핑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나마 유인촌이 제일 멀쩡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이었으니 “찍지 마 ××” 정도 할 수도 있고, 실세 장관으로서 나라님 심기 거스르는 문화예술인들 손 좀 볼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이제 애국 어르신이 된 처지에서 “나랏돈으로 국가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망언을 망언으로 악재를 악재로 덮은 정권 치하 1년 반도 안 돼 우리는 이렇게 관대‘당’해져버렸다.

군사쿠데타를 미화하고 매국노를 옹호하는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본다. 드라마틱한 ‘주식 파킹’ 스토리와 특정인과의 친분설에 ‘가짜뉴스’ 딱지를 붙이고는 입을 닫아버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본다. 법을 잘 몰라 송구한 대법원장 후보자도 본다. 해마다 수천만원꼴로 꼬박꼬박 배당받던 비상장 주식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려야 하는지도 몰랐단다. 자녀의 국외 재산 신고도 빼먹고 증여세도 아끼고 땅투기도 했다. 하나같이 ‘믿고 걸러야 할’ 이들만 고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맡을 업무에 대한 이해와 역량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재명을 도저히 찍을 수 없어 윤석열을 찍은 이들과 윤석열을 도저히 찍을 수 없어 이재명을 찍은 이들 사이에서 괴로워한 나머지 기표소를 나오자마자 기억을 지워버렸다고 주장하는 한 친구는 요새 ‘정치적 회빙환’에 빠져 있다. 회귀와 빙의와 환생, 웹소설에 이어 드라마로도 확장된 이 성공 공식을 정치에 접목했다. 일찍이 20세기 마지막 대선에서 두 후보 가운데 고민하다 ‘선택적 소거’를 해본 나는 그의 창작열을 이해한다. 친구는 유일하게 ‘회빙환 썰’을 들어주는 나를 붙잡고 윤 대통령이 당은 이준석에게, 행정은 유승민에게 맡긴 세상을 펼쳐 보였다. 약속을 지켜 30대 장관을 줄줄이 임명했다며 언론에 자주 나오는 천하람, 김재섭, 김용태, 이기인, 신인규를 읊었다. 나는 거기에 ‘개취’로 김근식, 이언주를 얹었다. 가히 어벤저스급 내각 탄생이다. 쓸 만한 인재가 이렇듯 많…지만, 현실은 한심하고 지루한 범죄 서스펜스.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는 일찍이 문재인 대통령 당선 즈음, 심상정 노동 혹은 교육부 장관, 유승민 경제부총리 등을 거론하며 ‘초당적 짝짓기 놀이’를 잠깐이나마 즐겼다. 그때는 ‘회빙환’이 아닌 ‘판타지 멜로’였다. 희망에 차 순진했던 시절이다. 문 전 대통령이 진영과 세력을 뛰어넘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 최소한 무능하고 옹졸할지언정 포악하지는 않은 위정자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포악하기만 하면 그 성정 그대로 이해할 텐데 비겁하기까지 하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제 맘대로 당을 다 주무르면서 아닌 척하는 모습이라니.

견제하거나 맞서기를 더불어민주당에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민의힘만큼도 젊은 인재가 안 보인다. 박성민, 권지웅, 이동학 정도 외에 ‘보신 눈’ 구하고 싶다. 오죽하면 반백살이 넘은 박용진이 여전히 소장파 노릇을 하고 김성회가 도전자가 되며 현근택이 물을 떠다 나를까. 초라한 현실이다. 민주당은 그동안 뭘 했나. 스스로 크려고 했던 이들조차 주저앉힌 건 아닌가.

자기 살자고 당을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야당 대표는 그만 보고 싶다. 단식하는 야당 대표를 막말로 조롱하며 역시 자기 살자고 난데없이 제 지역구에서 1인시위를 하는 여당 대표도 눈 뜨고 봐주기 힘들다.

한가위 보름달에 빌기라도 해야 할까. 부디 잡범들이 코웃음 치지 않을 공직자를 내려주세요. 제발 맨정신인 사람이 나라를 이끌게 해주세요.

김소희 칼럼니스트

*정치의 품격: ‘격조 높은’ 정치·정치인 관찰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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