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수사심의위는 ‘그들’만의 것인가

‘국민적 의혹’ ‘사회적 이목’ 추상적 문구로 한정해
수사 관행에 의문 제기하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문 열리지 않아
등록 2020-09-05 08:02 수정 2020-09-06 01:21
왼쪽부터 사진 1, 사진 2

왼쪽부터 사진 1, 사진 2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해 절차를 종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영신·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8월25일 의정부지검으로부터 A4용지 한 장짜리 서류를 송달받았다. 이 서류(사진1)는 원곡법률사무소가 대리한 ‘이주노동자 임금체불 사건’이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사심의위) 심의 대상이 아니기에 수사심의위를 소집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로, 다섯 줄에 걸친 문장 하나가 전부였다. 조 변호사는 “그 문장 이상의 설명은 없고 재고를 요청하는 절차도 없어서, 왜 수사심의위 대상이 아니라는 건지 이유를 더 따져물을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왜 수첩의 기록만 문제 삼는가”

변호사들은 3월10일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ㄱ씨를 대리해 그의 농장주를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ㄱ씨는 2016년 7월부터 2년 동안 경기도 포천시 한 농장에서 참나물, 얼갈이 등을 재배하고 수확했다. 농장주는 그의 실제 근무시간을 축소해 임금을 지급하고, “요즘 일이 없다”며 아무 예고 없이 그를 해고했다. 체불된 임금은 1367여만원, 해고예고수당은 170여만원이었다.

검찰로부터 사건을 내려받은 고용노동부 의정부지청은 “당사자가 수기로 작성했다는 출퇴근 기록부 일부 내용이 부정확하다” “농장주의 법 위반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고 설명하며 불기소(혐의 없음) 의견을 냈다. 검찰은 이 의견을 받아든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6월30일 불기소 처분했다.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7월29일 변호사들은 불기소 처분이 적정한지 따져달라며 수사심의위 소집을 요청했다. “근로시간이 부정확하게 기록돼 받아야 할 임금을 못 받는 이주노동자가 많아요. 수첩의 신빙성을 조사하는 것도 맞지만, 노동시간을 기록하지 않는 사업주에게도 수사력을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검찰 수사 관행에 시민들 의견을 묻고 싶었어요.”(최정규 변호사) 그러나 사건관계인이 수사심의위 소집을 요청할 때 위원회 소집 여부를 결정하는 부의심의위조차 열리지 않은 채 절차는 마무리됐다.

수사심의위는 외부 전문가들이 검찰 수사와 기소 과정을 심의하는 제도다. 수사를 계속할지, 기소·불기소할지, 이미 내려진 기소·불기소 처분이 적정한지 따져본다. 검찰 수사 절차나 결과에 대한 국민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 2018년 1월 시행됐다. 수사심의위 운영 규정은 검찰 예규(수사심의위 운영지침)에 정리됐다. 이에 따르면 심의 대상은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국한된다. 이 추상적인 규정이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탓에 이주노동자나 지적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가 수사심의위로 향하는 문이 철통같이 닫혀 있다.

원곡법률사무소는 8월13일에도 비슷한 서류(사진2)를 받았다. ‘사찰 노예’라 불리던 지적장애인 편아무개(54)씨 노동력 착취 사건이 수사심의위 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통보였다.

‘사찰 노예’ 사건 수사 진행 일지

‘사찰 노예’ 사건 수사 진행 일지


소집 요청 접수 뒤 한 달이 지나도

지적장애 3급인 편씨는 서울 노원구 한 사찰에서 32년간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 스님’이라 불렸지만, 행자 신분으로 2017년 12월 사찰을 벗어나기 전까지 머슴처럼 허드렛일만 했다.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건 물론, 부동산 거래에 명의까지 도용당했다. 그러나 주지 스님 최아무개(69)씨는 폭행 건만으로 약식기소돼 벌금 500만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최 변호사 등은 2019년 7월 지적장애인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한 최씨의 죄를 물어달라며 그를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2020년 1월 경찰은 “(노동력 착취가 아닌) 절에서 스님들이 힘을 합쳐 잡일을 하는 ‘울력’에 해당된다”며 부동산 명의 도용 건만 기소 의견으로 서울북부지검에 송치했다. 이 의견을 받아든 검찰은 5개월여 피해자나 고발인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최 변호사는 7월1일 기소·불기소 여부에 대한 시민의 판단을 묻기 위해 수사심의위 소집을 신청했다. 수사심의위 소집 속도가 빨랐던 검·언 유착(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불법 승계(9일) 의혹과 달리, 소집 요청을 접수한 뒤 한 달이 지나도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검찰은 8월10일 뒤늦게 A4용지 두 장 분량의 보도자료를 냈다. 편씨에게 각종 일을 시키고도 마땅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혐의(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등)로 최씨를 기소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자료 말미에 서울북부지검 검찰시민위원회 위원장은 이 사건이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수사심의위 심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또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심의가 불가능했다 뿐이지, 심의 여부 결정이 지연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수사심의위 요청 당사자인 최 변호사가 관련 통지를 전달받은 건 이 보도자료가 나가고 며칠이 흐른 뒤다.

“사회적 이목이 쏠리는 사건이란 게 뭐죠? 신문에 몇 번 나와야 사회적 이목을 받는 사건인가요?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는 애초 사회적 이목을 끌 수 없잖아요.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타이트’한 운영이 제도 취지를 퇴색시킨다고 생각해요.”(최 변호사)

자의적 해석 가능한 모호한 규정

실제 수사심의위가 소집된 사례를 살펴봐도, 제도는 일반 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수사심의위는 사건관계인의 소집 신청, 검사장 요청, 검찰총장 직권에 의해 소집할 수 있다. 대검이 시민단체 참여연대에 보낸 답변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사심의위는 모두 10건 열렸다. 그중 7건이 검찰에 의해 소집됐다. 문무일 검찰총장 시절 총장 직권으로 5건, 검사장 요청으로 2건이다. 사건 관계인의 신청으로 수사심의위가 소집된 사례도 이재용 부회장이나 한동훈 검사장 쪽이 요청한 2건과 비공개 사건 1건 등 3건에 그친다.

참여연대는 국회 논의를 거친 법률이 아닌 예규를 통해 만들어진 수사심의위는 그 태생부터 위원회 구성은 물론, 수사심의위 부의에 대한 판단, 수사심의위 소집·운영에 검찰이 개입할 여지가 컸다고 지적한다. 박영민 참여연대 간사는 “수사심의위는 검찰이 직접 검찰개혁에 동참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졌지만, 수사심의위 운영 방침을 정한 이 규정도 국회에서 논의해 만든 법률도 아니고 예규에 불과하다. 국민적 관심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됐다는 표현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해 검찰에 자의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검은 부의심의위에 회부되지 않는 소집 요청 건수는 집계하지 않는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이들의 불만은 빗발친다.

20개월째 수사 답보 상태인 ‘국회의원 예산사기 의혹’도 8월6일 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검찰시민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통지를 받았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검찰 수사나 처분이 이유 없이 지연돼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이용하지 못한다. 검찰이 판단하기 부담스러운 사건들만 수사심의위가 열리다보니 검찰이 여론 무마용으로 수사심의위를 활용한다는 비판을 듣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