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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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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을 만들면 망하는 시장은?

16년간의 학원 운영, ‘교육 현장’이라 생각했는데
학원은 학부모가 원하는 서비스 판매업이었네
등록 2021-04-17 11:49 수정 2021-04-21 01:37
서울의 한 학원 수업 모습. 책상 앞에 사물함에 넣지 못한 참고서가 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서울의 한 학원 수업 모습. 책상 앞에 사물함에 넣지 못한 참고서가 쌓여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내가 가장 오랫동안 했던 직업은 학원 원장이다. 남편과 나는 2005년 영어학원을 하나 만들어서, 2020년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질 때까지 16년 동안 경기도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어렵게 학원 임대 보증금을 마련해주면서 “돈은 좇으면 도망간단다. 그냥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무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린 셈이 어두워서 어차피 큰돈 벌 꿈은 꾸지 않았다. 밑지지 않게 운영하면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재미나게 하고 싶었다. 뜻을 펼칠 수 있는 교육 ‘현장’을 하나 가졌다는 게 뿌듯했다.

좋은 선생님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한 아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몇 년 동안 가까이에서 보는 건 큰 기쁨이었다. 아이들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 어른의 것보다 절대 작지 않다는 것도 이해했다. 다행히 내가 만난 아이들은, 판단하지 않고 곁에 있어주면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졌다. 선생은 그럴 때 보람을 느낀다.

중학생이 되자 찾아온 업무 ‘내신 관리’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한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원 운영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 사교육 문제를 지적할 때면 더 위축됐다. 학원은 선행학습을 주도하는 사교육 병폐의 핵심이자, 입시 위주 교육에 기생하는 부도덕한 사업장처럼 보였다. 학교 교육이 아닌 부분에서 가르치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인 걸까? 학원(나아가 사교육)이 없으면 학교(나아가 공교육)는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학생들은 전인적으로 성장하며, 가계 살림은 나아지고, 사회 불평등은 줄어들까? 큰 틀에서 보면 그 말이 옳을 거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면 그때 학원을 접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까지는 내 할 일을 잘하고 싶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지만, 한국 교육의 문제 때문에 학원도 고충이 많다. 사교육 시장에서 소비자는 학부모이고, 학원은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판다. 그러니 원장이 남다른 교육철학과 장인정신으로 무장해서, 소비자의 욕구와 상관없이 자기 딴에 좋은 것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대부분 망한다.

우리는 프로젝트 수업을 했다. 학생들이 직접 주제를 정하고 연구해서 결과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영어로 ‘발표’하기도 가르쳤다. 적절한 표현을 익히고 연습하면, 아무리 기초반이어도 준비한 것을 발표하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시 문화회관을 빌려서, 학생들이 큰 무대에 서보도록 했다. 나는 객석에 앉아서, 언젠가 이들이 어른이 되어 자신의 무대에 설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구구절절 적으면 다 자랑질이 될, 실험적인 일을 많이 했다. 이게 성공했으면 나는 지금쯤 학원 성공 신화를 써야 한다.

학생들이 중학생이 되자 ‘내신 관리’를 해줘야 했다. 중1은 자유학년제라 여유가 있다지만, 학부모들은 여유가 없었다. 중학교 때 영어를 끝내야 고등학교 때 수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영문법 3600제’ 문제집을 영혼 없이 푸는 일을 우리도 시작했다. 안 그러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망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고개 숙이고 꾸역꾸역 시시포스의 바위를 올리는 것 같은 아이들을 나는 고작 피자나 치킨 따위를 사주며 위로했다.

서비스, 어떤 것은 정당하고 어떤 것은 지나친

부모는 학원에 요구하는 것이 많다. 성적 올리기, 숙제 많이 내고 꼼꼼히 점검하기, 단어시험 자주 보기, 공개수업 하기, 친구와 같은 반으로 묶어주기, 담임선생이 자주 전화하기, (실력과 상관없이) ‘레벨 업’ 해주기를 기대하고 요구한다. 돈을 냈으니 그만큼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것은 정당하고, 어떤 것은 지나치다. 학교에도 이렇게 요구할까? 공교육 재원이 세금이면 그것도 결국 부모가 낸 돈일 텐데 말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실내에서도 찬찬히 걷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뛰어다녔다. 운동장에서 놀 시간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우미 교사가 말릴 틈도 없이 남자아이 두 명이 건물 밖으로 질주해나갔다. 앞에 가던 아이가 “슈퍼 파워”를 외치며 유리문을 닫는 바람에 뒤따라 달려가던 아이 얼굴이 유리문에 부딪쳤다. 앞니에서 피가 났다. 같은 건물에 있는 치과에 다친 아이를 바로 데리고 갔다. 며칠 뒤 ‘피해 학생’ 부모가 ‘가해 학생’(미안하다, 이렇게 불러서)과 학원에 치료비로 1800만원을 요구했다. 다행히 이가 빠지지도 금이 가지도 신경이 다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라도 빠질 것을 대비해 치아 두 개를 임플란트 하고 80살까지 7년 주기로 교체하는 비용을 청구했다.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학원은 학부모와 다퉈서는 안 된다. 우리 몫을 지급했다. 의문이 들긴 했다. 이런 일이 학교에서 벌어져도 학부모가 이렇게 요구할까?

사고 이후, 나는 아이들에게 보행 연습을 시켰다. 학원에서 가르쳐야 하는 일인지 회의가 들긴 했지만, 아무 데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면 누구라도 가르쳐야 하는 일이다. 실내에서 뛰지 않고 걷는 것, 유리문을 열 때는 뒤를 돌아보고 사람이 있으면 문을 잡아주는 것, 뒷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생큐”라고 말하는 것, 잡아준 사람은 “유어웰컴”이라고 답하는 것.(영어학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앞에 있으면 사이를 비집고 가지 말고 “익스큐즈미”라고 말하고 뒤로 돌아가는 것, 부딪치면 “아임 소리”라고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을 시간 날 때마다 소방훈련처럼 했다. 사실, 이건 어른들도 잘 안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영어권 사회에서 때때로 무례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만 잘 써도 소통의 격이 올라간다. 이런 훈련이 문법 3600문제를 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수업하지 않고 ‘딴짓’했다고 학부모가 항의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다. 학원에서 시간은 돈이다.

학생은 누구 탓을 해야 하나

미안하다. 나는 계속 남 탓을 한다.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그걸 몰라주는 학부모를 탓하고, 영어로 소통하는 데 별로 소용없는 시험문제로 학생을 평가하는 학교와 수능시험을 탓한다. 교사도 학부모도 교육관료도 교육학자도, 다 서로 물고 물리면서 다른 이들을 탓하고 있을 거다. (그들은 모두 학원 원장들을 탓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 학원에서 묵묵히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은 지금 누구를 탓하고 있을까? 학생들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탓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포기했다면, 그게 더 미안하다.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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