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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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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아픈 거야

등록 2023-02-28 02:21 수정 2023-03-06 07:29
<한겨레21> 제1452호 표지

<한겨레21> 제1452호 표지

‘애견 유치원’에서 일하던 A는 혼자 청소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발목,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일하느라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혼자 근무하는 곳이라 병원에 가면 “강아지들밖에 안 남으니까 무슨 사고가 날지” 걱정도 됐다. 한 달을 참으며 하루 12~16시간씩 일했다. 사고 한 달 뒤 찾아간 병원에선 연골판이 뜯어진 것 같다며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수술받고도 하루 뒤 출근했다. 회사에 산업재해 처리를 요구했지만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던 A는 결국 퇴사한 뒤 자비로 치료받고 있다.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펴낸 `일 때문에 아픈 거야: 2022 청년여성 산재 회복 지원사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읽다가, A의 사연에 눈길이 머물렀다. 영화 <다음 소희>의 주인공 소희(김시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희는 특성화고등학교 ‘애견학과’ 학생이었다. 애견학과를 다니지만, 강아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취업했다.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대기업”이라며 대형 통신회사의 하청업체인 콜센터 현장실습생으로 소희를 보냈다. 소희는 고객의 성희롱과 폭언에 시달리며, 고객과의 대화 내용에 대한 팀장의 실시간 감시를 받으며, 회사가 정해둔 ‘해지 방어’ 실적을 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매일 야근하며 아무리 실적을 올려도 회사는 현장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인센티브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닭장’ 같은 콜센터 사무실에 빽빽이 앉아 있는 젊은 여성들 모두가 현장실습생이거나 현장실습생 출신이었다.

실제의 소희가 있었다. 2017년 전북 전주의 한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홍수연. 그는 엘지유플러스가 위탁한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했다. 수연 역시 소희처럼 콜 수 등 실적 압박을 받았다. 수연은 감정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다음 소희> 개봉 이후 현장실습생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겨레21>은 조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소희와 같은 청년여성 노동자의 산업재해 문제다. 보통 ‘산재’ 하면 떠올리는 단어가 있다. 중대재해, 건설현장, 추락·끼임·전도로 인한 사고, 50~60대 남성 노동자… 가장 심각하고, 가장 보편적인 산재 유형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산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젠더 데이터 공백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한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표준 남성’을 중심으로 무거운 물건을 드는 방식, 화학물질 노출 영향 등이 연구되거나 통계로 집계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돌봄노동, 감정노동에서의 산재 문제는 ‘남성의 얼굴’을 한 산재보다 하찮게 여겨진다.

소희처럼, 수연처럼 사회에 첫발을 디뎠던 청년여성 노동자는 불안정한 노동환경에서,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한 무시와 모멸감을 견뎌내다가, 몸과 마음이 아파지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의 아픔을 산재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잘릴까봐 버티거나, 아프다는 이유로 쉽게 해고된다.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은 산재보험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여성의 신청을 받아 50명에게 치료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했다. 박다해 기자가 이번 지원사업의 ‘실태조사 보고서’를 입수해 50명의 사례를 살피고 이 가운데 4명을 직접 만났다. 우리 곁의 소희들 이야기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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