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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시즌2의 레드카펫 깔아준 1심 판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판사 독립성 침해 등 인정하면서도 47개 혐의 모두 무죄… 이탄희 의원 “사법농단의 진짜 피해자들 잊혀”
등록 2024-02-02 16:10 수정 2024-02-04 09:06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24년 1월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사법농단 혐의' 1심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오며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24년 1월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사법농단 혐의' 1심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오며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피고인들은 각 무죄.” 여덟 글자의 이 주문을 읊기까지, 재판부는 장장 4시간27분 동안 선고문을 읽었다. 2024년 1월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재판장 이종민)는 ‘사법농단’ 의혹의 윗선으로 꼽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 개입이나 판사의 독립성 침해 행위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모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 등으로 47개 혐의 모두 무죄로 판단됐다. 사건이 외부로 드러난 지 6년11개월, 검찰이 기소한 지 5년여 만의 1심 판결이다.

그러나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일하며 ‘판사 뒷조사 파일’의 존재를 알게 되자, 법원에 사표를 던지며 사법농단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렇다면 사법농단 ‘몸통’이 귀신이란 말이냐”고 반문한다. 1월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 의원과 만나 판결의 한계를 짚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한 면에 4쪽씩, 양면으로 인쇄한 3200쪽짜리 판결문이 놓여 있었다.

“5년간 이뤄진 일에 지시자 없다니, 집단 하극상?”

사법농단은 2011년 9월~2017년 9월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재판에 개입하거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는 등 판사 독립성을 침해한 의혹 등을 일컫는다.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당시 법원행정처장)은 기소된 피고인 14명 중 가장 최정점에 서 있다. 그러나 의혹은 양 전 대법원장까지 미치지 못한 채 실무선에서 그쳤다. 재판부는 실무책임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나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직무권한이 있는지, 이를 남용해 타인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했는지, 이에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모했는지 차례로 따졌는데 재판에 관여할 권한 자체가 없거나 공모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봤다. 사법부 내부의 구조적 문제에서 문제적 개인의 일탈로 사건이 축소된 셈이다. 임종헌 전 차장은 2023년 6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지만 진술 거부권을 행사하며 침묵했다.

이탄희 의원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5~6년여에 걸쳐 이뤄진 일이다. 법원행정처의 수많은 직원, 판사, 고위법관, 대법관들 모두 연루된 사건인데 지시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많은 사람이 양승태 대법원장 몰래 (이런 행위를) 했다면, 집단 하극상이란 말인가. 법원행정처는 3천여 명의 판사 중 30여 명을 발탁해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비서조직으로, 한두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설명할 수 없다. 상식에 반한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4년 1월3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4년 1월3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판결문에 남은 재판 개입 실체

1심 판결은 이규진 전 상임위원 등의 1·2심 판결이 양 전 대법원장과의 공모를 일부 인정한 것과도 배치된다. 당시 재판부는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소모임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 활동을 저지하려 한 행위 등에서 양 전 원장과 이 전 위원의 공모를 인정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1심 재판부는 이 전 위원의 진술이 번복됐다는 이유 등으로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 결정 사건 등은 재판 개입에 해당한다고, 파견 법관을 통한 헌법재판소 내부 정보 수집이나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시도 등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그런데 1심 무죄 결론을 앞세워 재판 개입 의혹의 실체가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여론도 나온다. 거대 양당이 1심 결과에도 아무 반응을 내놓지 않으면서 이런 여론을 더 부추기는 모양새다. 1월29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양승태 1심 무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묻자 “사실상 대법원의 수사 의뢰로 진행된 사건”이라며 책임을 당시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돌린 게 대표적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시절,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로서 사법농단 수사를 진두지휘한 수사 책임자다. 민주당도 별다른 논평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 의원은 “(한동훈 비대위원장) 본인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인가. 수사할 때 의뢰하면 의뢰한 대로 자판기처럼 수사 결과를 뽑아냈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중요한 건, 피해자 입장에서 이 사건을 다시 비춰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법농단 의혹이 “법원과 검찰, 여야의 싸움으로 비화하는 사이, 강제징용 피해자 등 사법농단의 진짜 피해자들은 잊히고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거대한 퇴행

이번 1심 무죄 판결은 생각보다 법원에 긴 파문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판결문에는 사법행정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다는 이유로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줘도 이는 인사권자의 재량권에 해당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법원행정처 판사에게 재판 개입을 의심하게 할 만한 문건을 작성하게 한 것이 정당한 사법행정의 일환이라고 본 대목도 여럿이다. “1심 판결은 결과적으로 사법농단 시즌2의 레드카펫을 깔아준 셈이다. 튀는 판결 하면 안 되고, 게시판에 글 함부로 쓰면 안 되고, 언론이랑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되고. 그런 판사는 인사 불이익 줘도 괜찮다고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앞으로 사법부에 거대한 퇴행이 있을 수 있다.”

검찰에 기소된 14명의 피고인 중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이규진 전 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다. 임종헌 전 차장은 2월5일 1심 선고가 예정됐다.

고한솔 <한겨레>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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