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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안전’ 막으려 유가족 삶 바쳤다

등록 2024-04-26 11:24 수정 2024-05-02 06:07
정석채씨가 건설현장 사고로 숨진 아버지 정순규씨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정석채씨 제공

정석채씨가 건설현장 사고로 숨진 아버지 정순규씨의 영정을 들고 서 있다. 정석채씨 제공


아들은 아버지가 준 편지를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힘들 때마다 꺼내보며 글씨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기억은 의외의 순간에 힘을 발휘했다. 2019년 10월31일 건설현장 사고로 아버지가 숨진 지 1년, 정석채씨가 재판 기록을 읽다 수상한 서류를 발견한 것이다.

하청업체가 사고 현장의 안전관리를 책임지는 ‘관리감독자’로 아버지 정순규씨를 지정한 서류였다. 석채씨가 알기로 아버지는 현장 반장이었지만 안전관리를 맡진 않았다. 서명도 아버지 글씨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 결과 불일치였다. 석채씨는 원·하청 건설사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했다. 2024년 1월, 경찰은 원청은 제외하고 하청의 사문서위조 혐의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각종 안전관리 서류에 허위로 서명하는 건 산업현장의 흔한 관행이다. 그러나 유가족이 구체적 증거를 찾아내 형사 고소까지 한 사례는 드물다. 석채씨에게 이번 투쟁은 어떤 의미일까. 2024년 4월28일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앞두고 <한겨레21>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문서위조 혐의로 하청업체가 기소 의견 송치됐다고 들었다.
“산업현장에 안전 관련 가라(허위) 사인이 너무 많다. 워낙 관행처럼 내려오다보니 실제로 송치될까 변호인단도 반신반의했다. 유가족이 필적 감정도 받고 방송에도 나와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하청 쪽만 송치되고 원청이 빠진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청의 관리감독자 지정에 원청 책임이 크다는 취지인가.
“지정서에도 원청 경동건설 마크가 크게 찍혀 있고 경동건설 현장소장 직인도 있다. 경동건설이 몰랐을 리 없다.”

—문제가 된 서류를 어떻게 찾아냈나.
“아버지 사고가 있은 지 꼭 1년째 되는 2020년 10월31일이었다. 법정에 제출된 자료 수백 장을 살펴보는데 경동건설이 낸 관리감독자 지정서가 끼어 있었다. 손글씨로 아버지 이름을 서명해놓았는데 아무리 봐도 아버지 글씨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 기관에 맡기니 불일치 판정이 나왔다. 이런 내용도 공소사실에 추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담당 검사 교체로 흐지부지됐다. 결국 고소를 따로 했다.”

—관리감독자 지정서 위조가 왜 중요했나.
“원·하청은 사고 당시 그 서류를 근거로 ‘정순규는 현장 안전을 다 책임지는 관리감독자’라고 주장했다. 즉, 숨진 아버지에게 사고 책임을 돌린 거다.”

—정순규씨 죽음과 관련된 재판은 2022년 끝났다(원청 현장소장 등 3명 집행유예). 하지만 석채씨는 6년째 생업을 그만두고 투쟁 중이다. 이유가 뭔가.
“여기서 그만두면 또 다른 노동자들이,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 죽어가도 기업은 똑같은 매뉴얼로 대할 거다. ‘우리가 버텨봤는데 벌금 1천만원 내고 집행유예 받을 수 있다.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1%라도 할까봐, 그걸 막으려고 투쟁을 결심했다.”

—유가족이 사문서위조로 고소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결심으로 한 일인가.
“다른 산재 유가족들도 사건 처리 과정에서 사문서위조를 발견하는 일이 적지 않다. 안전교육 이수했다는 가짜 사인이며 보호 장구 받았다는 지급 대장 사인 등. 저라도 투쟁하다보면 언젠가 경동건설 김재진 회장 등 책임자들이 아버지 앞에 사과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동건설이 이제라도 사과한다면 어떨 것 같나.
“만약 이 사람들이 아버지 모셔둔 곳에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공식 홈페이지에도 게재한다면 지금까지 투쟁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쁜 짓 해도 상관없다’던 기업의 견고한 기득권을 깨는 역할도 하지 않을까 한다.”

—4월28일은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감사하게도 사문서위조 탄원에 1만7천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산재에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 가진다는 게 희망적이었다. 노동자가 안전할 때 시민도 안전할 수 있다. 앞으로도 아버지 정순규의 산재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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