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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문은 왜 ‘유대인 음모론’에 얽혔나

19세기 워털루전투 정보 미리 알아서 떼돈 벌었다는 신화 혹은 거짓
등록 2021-04-10 12:17 수정 2021-04-12 02:29
워털루전투 기간에 채권을 사서 큰 이익을 얻은 금융자본가 나탄 마이어 로트실트(영어 이름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초상화. 한겨레 자료

워털루전투 기간에 채권을 사서 큰 이익을 얻은 금융자본가 나탄 마이어 로트실트(영어 이름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초상화. 한겨레 자료

나폴레옹전쟁으로 유럽 각국의 재정은 파산 상태가 됐다. 해결책은 국가가 빚내는 것, 즉 채권 발행이었다. 각국의 경쟁적인 재정 수요를 충족할 정도로 채권을 발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17~18세기 유럽 궁정에서 재정을 관리하던 유대인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유대계 금융인이 유럽 각국에서 채권 발행·인수 업무를 함으로써 해당 정부와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거대 국제금융 자본가로 성장했다.

당시엔 전쟁자금을 조달하려는 정부 채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유대인 금융가들이 채권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전쟁을 조장·조작한다는 음모론이 나오게 된다. 이는 유대인이 세계를 단일정부로 지배하거나 배후에서 은밀히 통치하는 세계정부 음모론으로도 발전했다.

최상층 은행 절반이 유대인 소유

독일 베를린에서 1812~1815년 최상층 은행 32개 중 17개가 유대인 소유였다. 7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 소유했다. 이 중 9개 유대인 은행이 정부 채권 업무를 했다. 19세기 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600여 유대인 가구가 거주했고, 이들은 대부분 여전히 과거의 게토인 칙칙한 유덴가세에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프랑크푸르트의 12대 은행을 소유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전통’으로 불렸고, 전설적인 한 가문과 동의어가 된다.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게토 유덴가세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1744~1812)는 부모를 일찍 여의면서, 하노버의 궁정 유대인 오펜하이머의 집에 들어가 주화와 메달 매매 업무를 배웠다. 헤센카셀의 빌헬름 대공은 그의 최대 고객이 됐다. 마이어는 25살인 1769년 대공에 의해 궁정 유대인으로 임명되며,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의 문을 열게 된다. 특히 빌헬름 대공이 유력한 채권 매매업자여서, 마이어는 대공의 채권 업무를 중개하며 유럽 각국의 궁정과 폭넓은 관계를 맺게 된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의 석권을 알리는 예나전투가 벌어진 1806년, 빌헬름 대공은 나폴레옹의 점령을 피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마이어에게 넘기고 관리를 요청했다. 예나전투가 일어나기 8년 전인 1798년, 마이어는 셋째 아들 나탄 마이어 로트실트(영국 이름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를 영국 맨체스터에 보내 현지 법인을 맡겼다. 마이어는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교전 당사국인 영국에도 투자할 수 있었고, 다국적 금융자본으로 성장하는 선두 주자가 됐다.

네이선은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맨체스터에서 섬유 수출 회사를 차렸고, 1804년 런던으로 옮겨가 금융업에도 뛰어들었다. 아버지 마이어가 유동화한 빌헬름 대공의 재산이 네이선의 회사에 전해졌고, 네이선은 이를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은행을 확장하는 담보로 활용했다. 마이어는 다른 두 아들에게는 파리(프랑스)와 프랑크푸르트를 책임지도록 했다. 1812년 마이어가 숨진 뒤, 나머지 두 아들도 나폴리(이탈리아)와 빈(오스트리아)으로 진출했다. 아들 5명은 아버지의 유산을 공평하게 20%씩 상속받고는 각자의 도시에서 정부 채권 발행·인수 업무에 종사하며 천문학적으로 재산을 불려갔다. 이들이 구축한 유기적인 국제 네트워크가 주효했다.

로스차일드 신화가 쓰인 곳은 런던이었다. 1812년 영국의 군수책임자 존 헤리스는 네이선에게 스페인에서 나폴레옹 군과 싸우던 웰링턴 공의 군대에 군수를 조달하는 전비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네이선은 런던 금 시장에서 금괴를 사서 프랑스 해안으로 몰래 운반했다. 파리에 있는 형제 야코프가 이를 받아 파리 금 시장에서 환전했다. 이 돈은 스페인 은행가들에게 전달돼, 웰링턴 공의 부대에 스페인 돈(페세타)으로 지급됐다. 곧 이런 금괴 밀송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로스차일드의 신용이 높아져서, 그들의 어음만으로도 충분히 전비를 전달할 수 있었다. 유럽의 현지 업자들은 로스차일드로부터 어음을 받으면, 영국군에 군수품을 제공했다.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의 발상자인 창업자 마이어 암셸의 집. 가운데 있는 건물의 왼쪽 부분이다. 1869년 찍었다. 한겨레 자료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의 발상자인 창업자 마이어 암셸의 집. 가운데 있는 건물의 왼쪽 부분이다. 1869년 찍었다. 한겨레 자료

200년 동안 이어진 ‘반유대주의’의 씨앗

1812~1814년 네이선과 그의 형제들은 유럽 대륙의 정세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영국과 그 동맹국들의 채권을 샀다. 전쟁이 영국과 동맹국들의 승리로 끝나자, 로스차일드가 큰 이익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나폴레옹 몰락을 결정지은 워털루전투를 둘러싼 로스차일드 가문의 행적은, 로스차일드 신화의 정점이자 근대 이후 ‘유대인 음모론’을 본격화했다. 그 신화는 워털루전투의 승패를 미리 파악한 런던의 네이선이 이 정보를 가지고 런던 채권시장에서 거액의 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이 국제질서와 각국 정부를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유대인 음모론에서 로스차일드를 그 수장으로 만든 신화이기도 하다. 반유대주의 입장에서 쓰지 않은 저명한 유대인 역사가나 역사서도 이를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 사례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근대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촉발하는 중요한 재료였지만, 그 진위는 200년 동안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영국 런던 킹스턴대학의 저널리즘 교수 브라이언 캐스카트는 이 문제를 탐사 취재해 2015년 <워털루에서 온 뉴스: 웰링턴의 승리를 영국에 전하기 위한 경주>(The News from Waterloo: The Race to Tell Britain of Wellington’s Victory)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해 5월3일치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캐스카트 교수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중상비방: 워털루전투에서 나온 반유대주의 비방이 일축되는 데 왜 200년이 걸렸는가?’라는 기고글에서 네이선이 워털루전투의 승패를 혼자 일찍 알았다거나, 이를 가지고 런던 채권시장을 조종하거나 거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건 근거 없는 가짜뉴스라고 결론 냈다. 캐스카트 교수에 따르면, 이 신화는 워털루전투가 끝나고 30여 년 뒤인 1846년 파리에서 반유대주의자인 조르주 데른바엘이 ‘사탄’이라는 가명으로 발간한 정치 팸플릿에 처음 등장했다. ‘유대인 왕 로스차일드 1세의 교훈적이고 흥미로운 역사’라는 제목의 이 팸플릿이 주장하는 워털루전투와 네이선의 행적을 캐스카트 교수가 요약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15년 6월 그날 전장의 관측자였다. 밤이 다가오면서, 그는 프랑스군의 완전한 패배를 지켜봤다. 그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빠른 말들을 갈아타면서 그는 벨기에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폭풍이 모든 배를 항구에 묶어둔 것을 보고는 격노했다. 탐욕이 불가능을 인정하겠는가? 폭풍의 날씨에 굴하지 않은 네이선은 한 어부에게 왕의 몸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주고는 바람과 파도를 뚫고 영국 해안까지 데려다주기를 부탁했다. 네이선은 워털루전투에서 웰링턴 공의 승리가 영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24시간 전에 런던으로 들어왔다. 로스차일드는 전쟁의 승패를 알고는 주식시장에서 떼돈을 벌었다. 네이선은 단번에 2천만프랑을 벌었다.”

전쟁 승패를 처음 알았던 인물은 네이선이 아니다

데른바엘의 팸플릿에 처음 등장한 네이선의 행적은 그 뒤 변주를 거듭한다. 네이선은 당시 런던에 머물고 있었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파악하고 전달한 것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연락책들이었다는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네이선이 동맹군이 패배했다는 허위 정보를 흘려서 영국 정부의 채권 가격을 폭락시킨 뒤 매집해서, 승전보가 알려진 뒤 가격이 폭등한 채권을 높은 값에 팔았다는 시장조작설도 그런 변주의 하나다. 당시 네이선이 런던 금융시장에서 채권과 주식을 사고파는 생생한 장면도 묘사됐다.

캐스카트 교수는 네이선이 당시 워털루나 벨기에 해안에 있지 않았고, 그날 도버해협에는 태풍이 불지 않은 것으로 조사했다. 특히 네이선은 그날 금융시장에서 떼돈도 벌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런던 금융시장에서 가격 폭락이나 급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워털루전투가 벌어진 주에 발행된 신문들을 조사한 결과, 런던에서 그 승패를 알게 된 첫 인물은 네이선이 아니라 ‘도버의 미스터 C’라는 익명의 인물로 파악됐다. 그는 벨기에의 겐트에서 동맹군의 승리를 알고는 영국으로 직행해 6월21일 수요일 아침부터 런던에 그 소식을 전파했다. 공식적인 승전보가 도착하기 12시간 전이다. 그날 오후 3개의 신문에서 워털루전투 소식이 인쇄됐다. 수요일 저녁에 쓰인 뉴스는, 네이선이 겐트로부터 편지를 받아 정부에 전달했다고 보도한다. 이를 고려하면, 네이선은 전황을 일찍 파악하기는 했으나, 그만이 유일하게 알았던 사람은 아니다.

그럼, 네이선은 채권과 주식을 쓸어담을 시간이 있었을까? 물론 그럴 시간은 있었으나, 당시의 금융시장 규모와 작동 체계를 보면 떼돈을 벌 만큼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날 수요일 시장에선 자산이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승전이 확인되면서 채권과 주식 가격이 오르자, 네이선은 분명 자신의 매매에 ‘잘 대처’했을 것이다.

워털루전투 정보를 독점해서 떼돈을 벌었다는 로스차일드 음모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데른바엘의 팸플릿은 로스차일드 등 유대인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절정으로 오르던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로스차일드의 경우, 19세기 중반에 그 재산이 60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실물가치로 보면, 역사상 어떤 금융자본도 능가하는 재산이었다. 이 때문에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제6왕조’로 불렸다.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부르봉,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에 이은 ‘로스차일드 왕조’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소박하거나 쇠락한 가문

로스차일드는 분명 국제 금융자본의 선두 주자로서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은행은 지금 영국의 ‘엔엠(N.M.)로스차일드앤드선스’라는 소박한 국제은행으로 남아 있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 등지에서 자선사업가나 예술품 수집가, 와인 업자로 살아가고 있다. 양차 대전과 극악한 반유대주의를 거치면서 많은 재산이 몰수되고 다른 거대 국제은행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본사는 후손이 없어, 일찌감치 나폴리의 로스차일드에 흡수됐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빈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나치에 모든 재산이 몰수됐다.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에서도 마차가지다. 전쟁 뒤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재건됐으나,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은행 국유화로 다시 국가에 귀속됐다. 몇 년 뒤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영국의 로스차일드와 합병해, 지금의 엔엠로스차일드앤드선스로 변신했다. 로스차일드의 쇠락은 무엇보다 20세기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된 미국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엔엠로스차일드앤드선스 회장인 에벌린 로스차일드는 1988년 12월4일치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200년 동안 사업을 해왔으나, 미국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며 “이는 우리 가족이 범한 실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금도 로스차일드는 음모론의 원조로 소환된다. 로스차일드가 걸어온 행적과 영향이 크다보니, 의심스러운 사건이 벌어지면 얼마든지 로스차일드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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