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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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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스라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되지 않았다

추방·유배·귀환 신화는 허구…
탄압받는 소수 종교의 처지를 종교적 함의로 받아들인 자구책
등록 2021-01-02 15:45 수정 2021-01-06 01:26
2020년 12월3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도시 살피트 인근에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려, 이스라엘 국경 경찰과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다. 로이터

2020년 12월3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도시 살피트 인근에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려, 이스라엘 국경 경찰과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다. 로이터

추방, 유배, 유랑, 이산, 박해, 귀환….

유대인과 그 역사 담론을 관통하는 상징어들이다. 유대인은 정복자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에서 추방돼, 낯선 땅으로 유배돼, 전세계를 유랑해, 뿔뿔이 이산돼, 현지에서 박해받다가, 결국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는 것이 유대인과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적 내러티브다. 이는 유대인 문제와 역사 담론의 핵심이지만,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하는 작업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됐다. 이를 그저 당연시했을 뿐이다.

로마 점령, 유대인 추방 신화의 출발점

1980년대 들어 팔레스타인 역사를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영국 셰필드학파 등이 등장하면서, 유대인의 추방과 이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다. 특히 이스라엘 내에서 ‘신역사학자’가 나오면서 본격화했다.

슐로모 산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 역사학 교수가 2008년 <유대인의 발명>을 출간해 이 문제에 정면 도전했다. 그에 따르면, 객관적인 역사 기록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뿌리 뽑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유럽과 중동에 퍼진 유대인 공동체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난 이들의 후손으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추방 신화는 로마 점령에서 시작한다. 로마가 기원전 63년 시리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하스모니안 왕조의 유대왕국은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 유대교 열심당원들의 반란인 열심당 봉기(1차 전쟁)가 기원후 66년에 시작해, 73년 로마에 진압됐다. 기원후 6세기 남유다왕국을 정복한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성전 파괴 때까지 제1성전 시대에 이은 제2성전 시대의 종언이었다. 1차 반란 때 예루살렘이 함락된 70년은 유대인 추방과 이산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원년인 셈이다. 그 뒤 115년 2차 반란, 132년 3차 반란인 바르 코크바 반란으로 이어졌다.

유대사가들은 이 세 차례의 반란을 로마-유대 전쟁으로 본다. 당시 로마의 동지중해 지역 패권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고 평가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보복도 그에 비례해 커져 팔레스타인을 초토화했다는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항전을 고려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마는 결코 팔레스타인 주민 전체를 추방하지 않았다. 로마가 남긴 풍부한 기록에서 유대 땅에서의 추방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나서 왕족 등 지배 엘리트들을 끌고 갔으나, 로마는 이조차 하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서쪽 지역에서 군인들의 정착을 위해 현지 농민 마을을 소개한 적은 있으나, 이는 예외적인 조처였다. 근동에선 이런 예외적 조처도 적용되지 않았다.

주민 추방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유대인 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남겼다. 요세푸스는 66년에 시작한 열심당원 반란에 참여했다가 로마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로마군 지휘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자,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의 측근으로 지냈다. 그가 로마·그리스 사람들을 위해 쓴 <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는 최초의 유대사서다. 요세푸스는 유대사가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로마군의 예루살렘 포위로 100만 명이 죽었고, 로마 점령 뒤 대학살이 이어졌다고 전했다. 또 9만7천 명이 포로로 잡혔고, 다른 도시에서도 수천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의 갈릴리에서만 300만 명이 살았다고 적었다.

로마의 인구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를 남긴 19세기 독일 경제학자 카를 율리우스 벨로흐에 따르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로마 전체 인구는 54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최근 연구에선 로마의 절정기 때 인구를 7천만~1억 명 정도로 분석했다. 로마 제국의 절정기인 2세기 때 수도 로마의 인구는 현대의 중간 규모 광역도시권 인구 정도에 접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100만 명이다.

최근 몇십 년간 고고학의 성과로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왕국과 남유다왕국을 합친 가나안 지역 전체 인구는 약 46만 명으로 분석됐다. 이스라엘 고고학자 마겐 브로시는 이 지역의 밀 재배 능력을 기초로 봤을 때, 전성기인 6세기 비잔틴제국 때도 100만 명 이상을 부양할 수 없다고 결론 냈다. 고대 시대 내내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못했기에 인구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됐다. 이를 고려하면 유대에서 열심당원 반란 직전 전체 인구는 50만~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기껏해야 6만~7만 명으로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에도 극우 유대교인들이 2020년 12월3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영적 지도자 랍비 아하론 다비드 하다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에도 극우 유대교인들이 2020년 12월3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영적 지도자 랍비 아하론 다비드 하다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

100만 명을 죽였다? 불가능한 숫자

로마가 예루살렘에서 100만 명을 죽였다는 것은 물론이고, 9만7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숫자다. 로마-유대 1차 반란인 열심당원 반란 때 유대 땅에서 주민들이 그렇게 추방됐다면, 115년의 2차 반란, 특히 3차 반란인 132년 바르 코크바 반란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르 코크바 반란 뒤 로마는 유대에 가혹한 조처를 상당 기간 하기는 했다. 유대는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이 바뀌었다. 유대교 남성의 의무인 할례를 한 남자는 예루살렘으로 출입이 금지됐다. 3년 동안 예루살렘 근방에서는 종교 박해가 강화돼, 주민에 대한 가혹한 제한이 도입됐다. 하지만 바빌론 유수 때처럼 일부 주민이 집단으로 유배 가는 일은 없었다.

반란이 끝난 2세기 때도 다수의 주민이 여전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다. 한두 세대가 지나고 다시 유대는 번성했다. 2세기 말~3세기 초, 농업 인구가 회복하고 작물 생산도 안정됐다. 반란 뒤에도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간 증거는 유대인 특유의 종교문화적 성취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정체성과 종교의 발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토라(율법)의 주석서인 미슈나의 총 6편이 220년에 완성됐다. 현재 유대교의 주류인 랍비 유대교가 완성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랍비 유다 하나시가 주도한 이때는 유대 종교문화의 황금시대로 불린다.

그렇다면 로마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이은 유대인의 유대 땅에서 추방과 유배라는 신화는 어떻게 나왔을까? 이는 유대교와 유대인이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탄압받는 소수 종교와 그 신자로 살아가야 하던 처지를 종교적 함의로 받아들이려던 자구책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란 증표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이스라엘 유발 교수는 유대인 유배 신화는 인간을 구원하려고 대신 숨진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유배라는 처벌을 받고 있다는 기독교 신화에서 나왔다고 진단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의 저작에는 반유대적 유배에 대한 담론들의 근원이 깔려 있다. 유스티누스는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예루살렘에서 할례한 남자들을 추방한 것을 신의 집단적 처벌로 연결했다. 그를 뒤따른 기독교도 저자들도 유대인이 그들의 성지 밖에 머무는 것을 그들의 죄에 대한 징표와 처벌로 간주했다.

이런 기독교의 유배 신화가 유대인 전통으로 천천히 통합된 것이다.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가 4세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유대교와 유대인은 이단과 불신자로 자리매김됐다. 제국의 곳곳에 있던 유대교 신자들은 신의 처벌로서 유배 개념을 채택해, 자신들의 처지를 달래야 했다.

유배 개념은 단순히 고국를 떠나는 데서 나아가, 유대인 전통 내에서 형이상학적 함의를 띠었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자손에 속하고, 이는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에 필수적이었다.

기독교의 강력한 패권 아래 지내야 했던 유대교와 유대인의 고난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근원이기도 했다. 유대교 신자들에게 기존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진정한 메시아가 올 때까지 그 고통은 계속된다. 따라서 유배는 이런 고통의 세상에서 속죄하는 종교적 카타르시스의 한 형태다. 유배는 고국에서 추방된 것이 아니라, 구원이 아닌 상태일 뿐이다. 구원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왕이 올 때 도래한다. 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의 집단적 귀환도 이뤄진다. 죽은 자들도 부활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

기독교라는 패권 종교 문화 속에 탄압받는 종교적 소수자로 살아야 하는 유대인 처지에서 유배는 일시적 패배를 함의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구원의 미래라는 승리를 뜻한다. 그런 미래는 인간의 시간 밖에 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갈망하지만, 결코 귀환하지 않았던 이유다.

유대인 유배를 2차 성전 파괴에 연관시킨 첫 번째 언급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나온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만든 바빌론의 유대인 공동체는 바빌론 유수로 인해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다. 이들은 바빌론 유수 초기에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편 137)라고 고향 땅을 갈망했다.

이들은 유수 50년 만에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귀환이 허락됐지만 대부분 잔류했다. 기원전 2세기에 유대교 신정왕국이라 할 수 있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유대왕국이 성립돼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펼칠 환경이 됐지만, 유대 땅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로마에 의한 2차 성전 파괴는 1차 성전 파괴와 유배의 반복이고, 자신들의 바빌론 잔류는 영원하다는 종교적 함의가 된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이주 금지하는 유대교 율법

구원을 재촉하지 말고, 그 구원이 나오는 근원, 즉 예루살렘으로의 이주를 금지하는 많은 유대교 율법이 있다. 바빌론 탈무드에는 “이스라엘은 벽 위에 올라서서는 안 된다. 주께서 이스라엘에 세상의 민족들과 맞서 싸우지 말라고 명했다. 주께서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지 말라고 명했다”라는 유명한 3개의 서약이 있다. “벽 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성지로의 집단 이주를 의미한다. 그것의 명백한 금지는 유대인에게 유배를 파기할 수 없는 신의 법으로 수용하게 한다.

로마에 의한 2차 성전의 파괴 뒤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의 추방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방에 퍼진 유대인의 존재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역사학계에선 70년 로마에 대한 봉기에 앞서 이미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많은 유대교도가 거주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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