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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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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정에 서는 중남미의 거악들

에르난데스 온두라스 전 대통령, 코카인 밀수출 혐의로 뉴욕 법원에 압송
콜롬비아 대법원도 마약왕 ‘오토니엘’ 미국에 신병 인도 결정
등록 2022-05-01 08:37 수정 2022-05-02 08:12
2022년 4월21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에서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전 대통령(가운데)이 마약 밀거래 등의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받기 위해 미국 마약단속국(DEA)에 인도돼 비행기로 향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4월21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에서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전 대통령(가운데)이 마약 밀거래 등의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받기 위해 미국 마약단속국(DEA)에 인도돼 비행기로 향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4월21일(현지시각),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에서 수갑을 찬 남성이 미국 마약단속국(DEA)의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뉴욕 법원으로 압송된 이 남성은 불과 석 달 전까지 온두라스 최고 권력자였던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53) 전 대통령이다. 2014년 1월부터 8년간 집권한 에르난데스는 퇴임 한 달 만인 2022년 2월 미국의 인도 요청으로 자택에서 온두라스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에르난데스는 집권한 동안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등에서 코카인을 들여와 미국에 500t이나 밀수출한 혐의를 받는다. 미국은 중남미 불법 마약의 최대 시장이다.

미국의 새로운 골칫거리, 온두라스

앞서 2021년 3월엔 에르난데스의 친동생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토니 에르난데스가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서 종신형과 1억3850만달러(약 1750억원)의 재산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토니는 2018년 미국에서 185t의 코카인 밀수 지원, 뇌물 공여 및 알선, 위증죄 등으로 기소됐다. 토니는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일명 엘차포)에게서 대통령인 형에게 선을 대달라는 조건으로 100만달러를 받은 혐의도 있다. 엘차포는 1993년 과테말라에서 처음 체포돼 20년형을 선고받고 멕시코 감옥에서 복역하던 2001년과 2015년 두 차례나 극적인 탈옥에 성공했다가 붙잡혀 화제가 됐다. 그는 2017년 미국에 송환돼 2019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에르난데스는 엘차포의 뇌물 제공 혐의를 “100% 거짓, 웃기는 소리”라고 부인하고 동생에 대한 미국 법원의 선고도 “터무니없다”고 비난했지만 머잖아 자신이 미국 법정에 설 신세가 됐다. 메릭 갈런드 미국 법무부 장관은 “에르난데스가 온두라스를 ‘마약 국가’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최근 뉴욕 법원에서 열린 공모자 재판에서 검찰은 “온두라스의 마약 카르텔이 경찰, 군, 유력 정치인, 시장, 의원, 심지어 현직 대통령에게까지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에르난데스가 이미 재임 시절에 미국 수사망에 올라왔음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그를 이민과 안보 이슈의 동맹으로 대우”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보도했다.

멕시코와 중남미 여러 나라의 범죄 혐의자가 미국으로 끌려와 심판받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마약범죄가 다수이지만 돈세탁과 부패, 심지어 ‘정치적 손절’ 목적의 사법권 집행도 있다. 이런 가운데 온두라스가 미국행 마약의 중간 경유지로 급부상하면서 미국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불법 마약 몰수량, 2년 새 7배 증가

2022년 3월 미국 국제마약사법집행국이 공개한 ‘국제마약통제전략보고서(INCSR) 2022’를 보면, 2021년 1월부터 9월까지 새 온두라스 정부가 몰수한 코카인 등 불법 마약은 14.2t이다. 2020년 전체 몰수량(3.4t)의 4배 이상, 2019년(2.2t)에 견줘서는 7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 보고서는 “온두라스산 코카인이 미국 본토에 도달했다는 증거는 없다”면서도 “최근 10년 새 온두라스에서 소규모 코카인 재배지가 주기적으로 적발되고 있다”고 밝혔다. 온두라스는 에르난데스 재임 중 미국으로 몰려드는 중남미 난민을 막거나 돌려보내는 이민 통제의 핵심 협력국 구실을 했다. 에르난데스가 동생에 대한 미국 법원의 종신형 선고에 반발해 “양국 간 안보 협력이 파탄 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2021년 1월 온두라스 대선과 정권교체는 중남미 ‘분홍 물결’(핑크 타이드·좌파 정당 집권 물결)에 한 물결을 더 보탰다. 시오마라 카스트로 대통령은 중도좌파 정당인 해방재건당 소속이다. 2009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의 부인이기도 하다. 카스트로 대통령은 선거 기간 내내 에르난데스 집권 시절의 부패와 무능을 강하게 비판하며 부패와 조직범죄를 제대로 다룰 사법체계 개혁을 약속했다.

미국으로선 온두라스 정권이 바뀌고 에르난데스를 인도받았다고 해서 온두라스를 경유하는 마약 밀반입과 난민 유입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외려 온두라스의 좌파 정권과 불편하지만 실용적인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뿐 아니다. 접경국 멕시코가 마약조직 소탕을 위해 25년간 미국 마약단속국(DEA)과 공조해오던 특수부대를 2021년 해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미국의 마약범죄 대응 능력도 큰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중도좌파 정당 소속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4월21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1년 전 이 부대는 해체됐다. 고위 전략 그룹이던 이 부대에 범죄자들이 침투했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 안보기구들과의 협력은 멕시코의 주권이 존중되는 한 계속된다”고 덧붙였다.

에르난데스 형제의 체포와 기소는 비교적 매끄럽게 진행된 경우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4월7일 콜롬비아 대법원은 7년간의 도주극 끝에 2021년 10월에 체포된 마약왕 다이로 안토니오 우수가(50·별명 오토니엘)를 미국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오토니엘은 콜롬비아 최대 마약조직 ‘걸프 클랜’의 우두머리다. 파나마 국경 인근에서 은신했던 오토니엘의 체포 작전에는 특수부대 병력 500명과 군용 헬기 22대가 동원돼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현지 언론 <엘티엠포>는 “당국이 마지막 은신처를 체포 2주 전에 포착하기까지 50명의 정보 전문가와 위성사진을 활용해 그의 행적을 추적했으며, 미국과 영국도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오토니엘은 매년 180~200t의 코카인 밀매 혐의를 받으며, 미국을 포함해 28개국 이상에 마약을 공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직접 군사작전을 벌여 다른 주권국의 현직 대통령을 붙잡아온 사례도 있다. 1989년 12월, 미국은 2만6천 명의 병력으로 파나마를 전격 침공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출신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첫해였다. 작전 목표는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 축출, 명분은 국제 마약 거래 혐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 중앙정보국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던 노리에가의 마약 거래가 미국의 니카라과 우익 반군 지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데다, 노리에가가 제멋대로 굴면서 미국의 중남미 전략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헤비메탈에 투항한 노리에가

노리에가는 파나마시티 주재 바티칸 대사관으로 숨어들었다. 외국 공관은 국제법상 파견국 영토로서 치외법권이 인정된다. 미군은 고성능 스피커로 무장한 험비 차량으로 대사관을 에워싸고 귀청을 찢을 듯한 헤비메탈 음악을 틀어댔다. 극심한 소음과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노리에가는 14일 만에 투항했다. 미국이 국내법을 국경 바깥에서 물리적으로 행사한 폭력이지만, 법보다 힘이 앞서는 것은 국제사회라고 다를 게 없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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