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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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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의 나라’에는 축산업이 없다?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출구 찾는 유럽 양돈 농가들, 미래 세대 채식 인구 비중 늘어나 2034년 대체식품·육류산업 역전 전망
등록 2022-08-05 07:17 수정 2022-08-06 00:00
네덜란드가 적극적인 축산업 축소 정책을 펴고 있다. 네덜란드의 버려진 건초 헛간. 트위터 계정 P&P McBride 게시글 갈무리

네덜란드가 적극적인 축산업 축소 정책을 펴고 있다. 네덜란드의 버려진 건초 헛간. 트위터 계정 P&P McBride 게시글 갈무리

“앞으로 생태학적으로 허용 가능한 숫자의 돼지만 키운다.”

‘스마트팜’의 나라, 네덜란드가 축사를 허물고 있다. 당장은 돼지 축사를 줄이고 앞으로는 소고기, 닭 등 모든 육류 생산을 30% 넘게 줄이겠다는 목표로 적극적인 축산업 축소 정책을 펴고 있다.

네덜란드는 돼지 축사를 없애버리는 새 정책을 ‘자산 소각’(warme sanering varkenshouderij)이라고 부른다. 보험금을 받으려고 집을 태워버린다는 ‘바르머 사네링’이라는 말에서 왔다. 많은 농민이 반대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유럽은 지금 농축산 과잉생산 시대 청산으로 진통하고 있다.

네덜란드, 보조금보다 업종전환 지원금 더 많아

세계 돈육시장 점유율 7.9%.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돼지고기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다. 네덜란드 인구 172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의 3.2배를 생산(2020년 기준)한다. 독일 주간지 <차이트> 추산으론 네덜란드의 양돈산업은 네덜란드 국영항공사 케이엘엠(KLM)의 2배쯤 되는 80억유로 가치에 달한다.

돼지고기 수출로 많은 돈을 버는 나라가 돼지 축사를 허무는 등 막대한 자산을 소각하는 것은 축산업이 너무 비대해 다른 삶의 조건을 잡아먹는다는 위기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작지만 경쟁력이 높은 소농 중심의 네덜란드 낙농업은 한국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축산농가들이 자연보호구역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면서 큰 환경문제가 됐다. 네덜란드 자연보호구역 ‘나투라(Natura) 2000’ 근처 10㎞ 안에 있는 축사의 비율이 전체 축산농가의 80%다. 환경규제를 엄격히 적용한다면 대부분의 축사가 남아 있기 어렵다는 뜻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너무 많다. 이 좁은 땅을 누구와 어떻게 나눠 쓸지 선택해야 한다”는 반성이 나온다. 네덜란드 국영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기후위기 시대의 네덜란드 농가>를 보면 네덜란드에는 소 400만 마리, 돼지 1200만 마리, 닭 1억 마리가 산다. 특히 돼지 600만 마리가 사는 남부지방의 질소 오염이 심각하다.

축사에서 내뿜는 질소량이 위험수준을 넘으면서 ‘질소 위기’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2019년 네덜란드 정부가 질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기후보호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명시한 한 지방법원의 판결은 축산업을 줄이려는 정부 정책에 힘을 실었다. 정부는 축사에 환경정화 시설을 도입한 농가에도 보조금을 주지만, 그보다는 아예 축산업을 포기하고 업종전환을 하는 농가에 주는 돈이 훨씬 더 많다. 축사 철거 예산도 2020년 9500만유로(약 1235억원)에서 2022년 2억2800만유로(약 2964억원)로 해마다 늘리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축사 철거를 지원하는 한편으로 축산업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이래도 축사 수가 크게 줄지 않는다면 정부가 축사를 강제로 사들이도록 하는 법안까지 논의하고 있다.

2021년 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 있는 한 축산기업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유럽 최대 돼지 사육장인 이곳에 당시 빽빽이 밀집 수용된 돼지는 5만5천 마리. 소방 당국은 그중 1300마리밖에 구할 수 없었다. 돼지들이 갇힌 채 타 죽었던 화재 현장 사진은 독일에서 공장식 대형 축산업의 종말을 알리는 경고처럼 받아들여졌다.

독일 제트(Z) 세대의 13%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2019년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금요일’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환경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10대의 시위다. REUTERS 연합뉴스

독일 제트(Z) 세대의 13%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2019년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금요일’ 시위에 참여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환경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10대의 시위다. REUTERS 연합뉴스

독일도 ‘동물복지 해치는 헐값 고기는 없어져라’

돼지고기 생산량 세계 3위, ‘소시지의 나라’ 독일도 네덜란드식 축산업 철수 모델을 두고 격론 중이다. 지금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양대 축인 녹색당과 사회민주당의 정책을 종합해볼 때 고기에 동물복지를 위한 세금을 부과하고 축사를 폐쇄하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 두 가지를 모두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고기 가격을 높여 수요를 줄이려는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식 모델에 따라 사육 두수를 줄이는 정책이다. 녹색당 출신 젬 외즈데미어 농식품부 장관은 “농장을 망치고 동물복지를 해치는 헐값 고기는 없어져야 한다”며 “생산비보다 낮은 가격에 식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정한 가격을 매겨 고기를 가치 있는 음식으로 만들자.”(올라프 반트 독일 환경자연보전연맹(BUND) 회장) 공장식 축산업 퇴출을 주장하는 환경 관련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예전부터 높았지만, 축산업을 구조조정하고 고기 가격을 올리는 일은 어려웠다. 2020년 기준 독일에서는 2만 곳 넘는 양돈농가와 업체에서 돼지 2600만 마리를 키우고 있다. 육류사육협회 등 생산자 단체들은 축사 폐쇄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2021년 독일 킬대학에서 축산농가 445곳을 조사해보니 양돈농가 60%가 “보상금을 준다면 축사를 폐쇄하겠다”고 답하는 등 변화의 바람도 보인다. 또 다른 조사에서도 양돈농가 60%, 사육사 40%가 “10년 안에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그만두겠다는 이유로는 “사회적 지원 부족”과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식탐 줄이는 베이비부머, 채식하는 제트 세대

독일에서는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기간에 도축장에서 코로나19 집단 발병이 잇따르면서 열악한 노동조건이 알려졌다. 동유럽에서 온 노동자가 집단 거주하며 종일 돼지의 멱을 따는 실태가 보도되자 “축산업은 노동자와 동물을 모두 착취하는 산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논란 끝에 2021년 독일 최저임금이 9유로60센트(약 1만3천원)였을 때도 도축장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11유로로 정하는 제도 등이 마련됐다. 여기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휩쓸면서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하는 사건이 겹쳤다. 독일은 주로 중국 시장에 많은 양의 돼지고기를 수출했는데 수출길이 막힌 것이다. 축산농가는 도덕성 논쟁이 거듭되면서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데다가 경제적 동인마저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독일에서도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이 퇴장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비자의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 1955~1964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역사상 가장 식욕이 왕성한 세대로 불린다. 2000년 초반 이 세대가 경제적 주체가 될 무렵 독일에서 한 해 1인당 육류 소비량이 역대 가장 많은 양(60~62㎏)을 기록했다. 특히 돼지고기 1인당 소비량은 2010년 40㎏을 넘기면서 돼지고기 산업이 황금기를 누렸다. 2015년에는 한 해 6천만 마리가 넘는 돼지를 잡으면서 도축 신기록을 세웠다(독일 연방농업정보센터 자료). 그러나 2020년 기준 독일인의 육류 소비량은 한 해 평균 57.3㎏, 2021년에는 55㎏으로 최근 몇 년 새 갑자기 고기 소비가 크게 줄었다. 베이비부머가 예전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 않는데다 ‘제트(Z) 세대’라고 부르는 1990년대 중후반생부터 201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에서는 채식 비율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당 싱크탱크인 하인리히뵐재단과 분트(BUND)가 함께 매년 펴내는 먹거리 보고서 <미트 아틀라스 2021>을 보면, 이 연령대(15~29살) 인구의 13%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3분의 1이 “2019년에 고기를 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답했다. 고기, 우유, 치즈를 중시하는 유럽 식단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새로운 세대다. 코로나19와 릴레이 환경시위는 새로운 세대를 낳은 결정적인 두 사건으로 꼽힌다. 스웨덴에서 시작해 유럽 각국으로 퍼진, 환경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10대들의 시위 ‘미래를 위한 금요일’은 이들을 채식주의자로 키운 학교와도 같았다. 10~20대 비건 중에는 여성이 70%로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조사에서 “국가가 지속가능한 식단을 책임져야 하며, 축산업의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 세대 덕분에 인구 전체에서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 비율이 전체 인구에서도 1%대에서 2%대로 늘었다.

환경운동가들 “지금 바로 축사 4분의 1로”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이 추세라면 2034년쯤에는 먹거리 시장에서 비건들의 대체식품이 육류산업보다 비중이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2034년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 환경운동가들은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 대로 지구 온도가 1.5℃보다 더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축사의 4분의 1을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베를린(독일)=남은주 <한겨레> 통신원 eunjoonam@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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