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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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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 풍경을 다시 보지 못하리

<갈등도시> 김시덕 교수와 함께 걸어본 삼문화광장 영등포
등록 2019-12-19 02:55 수정 2020-05-02 19:29
(시계방향으로) 굽은 인입선 위로 굽은 고가도로가 생겼다. 영등포 공구상가에 있는 건물 중 하나로 한옥의 처마를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도시계획 지도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김시덕 교수. 영등포 청과시장.

(시계방향으로) 굽은 인입선 위로 굽은 고가도로가 생겼다. 영등포 공구상가에 있는 건물 중 하나로 한옥의 처마를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도시계획 지도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김시덕 교수. 영등포 청과시장.

재난문자가 발송된 12월9일 전날 8일도 미세먼지가 서울 도심에 가득했다. 이날 오후 1시 영등포역사에 모인 20여 명을 향해 김시덕 교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가 1939년 ‘시가지계획 영등포 토지구획정리계획 평면도’를 펴들었다. 1936년 행정개편으로 영등포는 대경성(서울)에 포함된다. 워낙 넓은 지역이어서 오랫동안 “서울과 독립된 하나의 도시”()처럼 여겨졌다. 1973년부터 관악구, 강서구, 구로구 등이 분리돼 나가면서 ‘영등포’라는 지명은 구의 이름으로 정리됐다. 일제강점기에 영등포는 조선피혁, 경성방직, 오비맥주, 크라운맥주 공장이 모인 산업지대였다. 경성과 인천 ‘경인 메트로폴리스’는 ‘연선 모든 지역이 도시화되었다’는 경인선 철도(1899년)와 경인로로 연결돼 있었다. 경인선과 경인로가 영등포에 자원을 조달하는 대동맥이었다면, 영등포역에서 비스듬히 놓이는 인입선 철도는 영등포 지대의 각 공장에 자원을 나눠주는 모세혈관이었다. 김 교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 세 길을 조망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이끌었다.

영등포 탐사지도 
소요시간: 1시간40분, 총거리: 5.5km

영등포 탐사지도 소요시간: 1시간40분, 총거리: 5.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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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층’이 모인 삼문화광장

이들은 (열린책들 펴냄)의 글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였다. 는 2년 전 김시덕 교수가 펴낸 (2016년 8월)의 방법론을 그대로 갖고 오되, 관심을 그가 ‘대서울’(서울 문화권)이라고 이름 붙인 지역으로 넓혔다. 김 교수는 자신의 독특한 답사법을 ‘문헌학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설명한다. 에서 그는 “문헌학자는 어떤 문헌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 문학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를 판단하기 전에, 눈앞에 있는 문헌이 저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는 서울시라는 ‘문헌’을 답사할 때도 그렇다. 그의 답사 방식은 찬란한 문화유산이나 아픈 근대의 흔적이 아니어도 평소 출근하고 지나치는 길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해나간다.

영등포역 육교가 세 길의 조망점이다. 앞으로는 ○○자원(고물상)❶을 비롯한 재활용업체가 모여 있다. 왼쪽으로 ‘문래창작촌’이라고 이름 붙은 제철소와 기계공업소들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하이트맥주 공장 자리에 공원(이전에 쪽방촌 밀집 지역이었다)이 조성돼 있다. 정면으로 경성방직 자리에 만들어진 쇼핑몰 타임스퀘어와 대형마트 이마트가 보인다. 모세혈관 역할을 한 인입선의 흔적을 따라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공장 건물이 그대로 남은 대선제분이 보인다. 풍경 전체를 둘러 아파트들이 높이 솟아 있거나 지어지고 있다. 1900년대 초기 공장인 대선제분, 당시부터 이어진 작은 공장들, 인입선 자리 위에 놓인 고가도로 그리고 현대의 빌딩들, 김 교수는 ‘시간의 층’(시층)들이 모인 풍경을 ‘삼문화광장’이라고 한다.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광장의 별칭에서 나왔다. 틀라텔롤코광장에는 아즈텍,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현대의 건축이 한곳에 있다고 한다. 구태여 ‘광장’이 아니어도 시간의 나이테가 한눈으로 관찰된다는 말이다.

이 삼문화 조망대로 가려면 영등포역 서쪽 쪽방촌을 거쳐야 한다. 이곳 초입에는 24시간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이라고 쓰여 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쪽방촌 주민들이 식사를 위해 긴 줄을 서 있다. 이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을 만나게 된다. 윤락업소 지역이다. 영등포구가 차례로 해제하고 현재 단 두 곳 남은 통행금지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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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과병원 벽에 숨은 명판

두 번째 통행금지구역을 지나서 고가도로 아래 건널목을 건너면 대선제분❷ 길로 들어선다. 도시계획 지도에는 대선제분을 포함해 넓은 지역이 흰 공간으로 표시됐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군사시설이어서다. 한국 현대 디지털 시대의 지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선제분은 1936년 문을 열었던 공장이다. 서울시에서 ‘민간주도형 재생사업’ 1호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거대한 사일로(저장탑)를 벽에 바싹 붙어 걸으면서 볼 수 있다. 도로로 난 좁은 길 공간을 탐색하면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수도 있다.

인입선 입구가 보이는 타임스퀘어 뒤쪽 소방서길 도로에선 청과시장의 정면을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심코 지나쳤다가 다음에 왔는데 사라지는 것이 서울에서는 일상으로 겪는 일이다. 지금 여기서 보는 청과시장 모습이 당신이 보는 마지막 모습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책 의 제목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그는 에서 급격하게 변하는 서울을 담기 위해서는 책을 해마다 갱신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에서는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며 매달 갱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월간 갈등도시’를 펴내야 할 판이라는 것이다.

길을 건너 타임스퀘어를 등지고 건널목을 지나면 김안과병원❸ 건물이 나온다. 김안과병원의 주차장 골목 벽에는 명판이 하나 박힌 채 죽어 있다. ‘二和알미늄工業社’. 김안과병원이 커지면서 주변 부지를 사서 확장을 거듭했다. 이전 공업사의 ‘대문’이었던 곳은 김안과병원의 옆길이 되면서 필요 없게 되어 입구가 막혔다. 그 옆에는 ‘영남빌딩’이 있다. ‘영남’은 영등포 지역의 남쪽이라는 말이다. ‘영중초등학교’와 ‘영중로’라는 지명도 넓은 영등포 지역을 나눠서 사고했던 방식의 흔적이다.

초기 영등포를 ‘강남’이라고 부른 흔적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1974년에 관악구 신림3동(조원동)에 강남아파트가, 1977년에 영등포구 당산동에 강남빌딩이 있었고, 1962년 공립공업학교에서 분리된 중학교의 이름은 강남중학교’()다. ‘후기’ 강남, 지금의 강남은 ‘영등포의 동쪽’ ‘영동’이었다. 1973년 토지구획개발을 시작할 때 강남에 처음 생긴 파출소도 ‘영동파출소’였다. 1986년 김연자의 노래 에는 “그대와 만나던 곳 서초동 주점에는 들창문을 때리는 밤비 소리뿐”이라 하고, 1989년 나온 문희옥의 노래 가사는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다. 1980년대 후반까지 트로트를 부르던 상대적으로 나이 든 세대에게 영동은, 유흥업소가 밀집한 ‘변두리’ 강남의 추억을 소환하는 이름이었다.

한국 최대 규모라는 영등포시장은 여럿 나뉘어 존재한다. 금방 지나온 영등포 청과시장, 영등포 중앙시장, 영등포 재래시장, 남서울 상가, 로터리 상가 등 사람들 왕래가 많으니 자연스럽게 기세 좋은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기세가 드셌던 만큼 개발은 더뎠다. 신길뉴타운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지만 영등포뉴타운은 이제 시작이다. 영등포시장역에 제일 먼저 들어선 아크로타워스퀘어아파트 주변에는 두 개의 주요한 근대시설을 볼 수 있다. 역과 영중초등학교 사이에는 지물포와 부동산이 들어선 흰색 벽돌 건물이 있다. 김 교수는 이 건물을 ‘병원’이라고 했다. 그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그는 성큼성큼 걸어간 뒤 테두리는 뚜렷하지만 글자는 거의 지워진 현판을 가리켰다. 눈을 비비며 보다보면 ‘합동병원’❹ 글자가 나타난다. 아파트 건설 현장 자리에 화물트럭 주차장이 있었고(부지가 커서 재개발이 쉬웠다), 사고가 나면 바로 도로 옆의 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지워진 간판과 달리 건물의 ‘머릿돌’은 뚜렷하다. ‘定礎 195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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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옆 조선시대 종교 시설

새로 지어 ‘흔적’ 없이 깨끗한 아파트 옆으로 세 가지 간판을 건물에 붙인 삼진도매상가를 비롯해 1990년대 아파트와 한옥 등이 시층을 드러내며 서 있다. 새 아파트에 딸린 공원 한 귀퉁이에는 상산 부군당❺이 있다. 원래 강가에 있던 것이 여러 번 옮겨졌다고 한다. 부군당이란 조선시대 상인들이 물류의 안전한 수송과 판매를 빌며 섬기던 일종의 ‘종교’ 시설이다. 제일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은 15세기지만(, 김태우) 형식이 변해왔다. 관원의 주도로 이루어지던 제사는 민간에 이전되고 유교에 무교가 결합했다. 영등포에만 상산 외에 당산동·방학곳지 부군당, 신기리 도당이 남아 있다. 이태원(기마 장군), 둔지미(제갈공명), 서빙고(이성계), 동빙고(단군 내외), 작은한강(물당애기씨), 큰한강(백마장군) 등 서울 전역에 모시는 이를 달리하며 흔적이 남아 있다. 김 교수는 상산 부군당 앞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승돼야 민간신앙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부군당을 섬기는 공동체는 사라졌다. 이곳도 의미를 잃고 곧 사라질 것이다.” 이미 ‘잠실리 부군당’은 당나무만 남기고 사라지고, 삼성동의 ‘물건너 화주당’도 1~2년 전 사라졌다.

시장길로 들어서면 아직도 성업 중인 기계부품 상가들❻이 나타난다. 정밀, 밧데리(배터리), 제작, 종합중기, 유압, 정공, 선반, 기공 등의 간판들 사이로 식당과 부동산이 있다. 이쯤에서 ‘도시의 문헌학’이 발동한다. ‘모-타’로 일본의 외래어 표기 방식대로 적거나, 정면에는 ‘베어링’이라고 적었으나 옆구리에는 ‘베아링’이라고 쓴 간판을 단 가게도 있다. ‘테크’라는 비교적 현대적인 간판과 ‘납’ 글자 밑에 ‘긴노’(은납)라고 손글씨를 쓴 간판이 함께 어우려져 있다. 집과 집 사이를 공들여 들여다보면 처마 형태로 한옥을 알아볼 수도 있고, 목재건물의 화재를 차단하기 위한 일본식 방화벽도 남아 있다.

개량한옥은 일제강점기에 서민을 위해 대량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덜하다. “서촌, 북촌에 한옥이 모여 있지 않다. 한옥은 영등포, 을지로 지역에 더 많다. 서촌, 북촌만이 살아남은 것은 그곳이 조선시대의 것이어서고 사대문 안이어서다.” 김 교수는 왕가의 재미없는 유산과 건물을 공들여 복원하면서 일제강점기 서민의 흔적을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지우는 것에 반대한다. ‘문헌학’의 눈으로 보면 당연하다. 중요하고 덜 중요한 시간이란 없다. 현대의 ‘개발’ 역시 흐름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민들의 중요한 유산은 보존해야 하지만,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현대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 “(프랑스) 파리 재개발에서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자들을 위한 도시가 만들어져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기도 했다. 그와는 다른 많은 이들이 현대의 이기를 나눠가지는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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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뉴스에 가려진 역사

재개발 광풍 속 영등포는 ‘부동산 뉴스’로만 등장하는 지역이 되었다. 새로운 건물이 무너뜨릴 역사, 과거의 건물이 현대의 건물과 어우러진 풍경은 관심 밖이다. 시층을 품은 채 남은 50~60년 된 건물이 무너진다. 이제는 다시 못 볼 풍경이다. 답사대는 영등포역으로 돌아와 부천(경기도)과 부평(인천광역시)을 이어서 답사했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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