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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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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우먼] 풍선값이 풍선처럼 불어나네

주진초등학교 운동회날, 다른 사람이 없는 품목을 ‘독점’해 팔아보니
등록 2020-12-06 08:08 수정 2020-12-10 01:03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주진초등학교 운동회날은 전교 여학생들이 풍선을 들고 무용을 한답니다. 운동회 2주 전부터 장날이면 어른들은 풍선을 사 날랐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도 풍선을 샀습니다. 주진초등학교 운동회에 쓸 풍선은 미리미리 다 준비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운동회날 남편은 풍선을 있는 대로 다 가져가보라고 합니다. “미리 많이 사갔는데 뭐 하러 많이 가져가나” 하니 미리 사갔기 때문에 다 터지고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풍선을 많이 챙겨줘서 마지못해 다른 장난감들과 같이 가지고 갔습니다.

사과 팔러 온 시어머니

어디 가나 멜로디언을 삑삑거립니다. 멜로디언만큼 사람을 불러모으는 데 효과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가끔 로켓도 쏘아 올리며 열심히 물건을 팔았습니다. 점심때가 다 돼가는데 어린 아들이 앞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습니다. 옆을 보니 우리 시어머니가 물건 파는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운동장에서 장사한다고 하니 사과 한 접을 가지고 지원을 오셨습니다. 시댁 앞집 아주머니도 사과를 가지고 같이 왔습니다.

앞집 아주머니는 친척이 아닌데 친척보다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앞집 아주머니는 젊어서부터 강원도 사북, 고한으로 다니며 고춧가루 장사를 하여 파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내가 시집갔을 때 앞집 아주머니는 새댁 이거 좀 먹어보라고 수시로 무엇을 갖다줬습니다. 아들을 낳자 거의 아침마다 와서 시어머니와 같이 아기 목욕을 시켜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반가워 인사하려는데 학생이 “아줌마 풍선 없어요?” 합니다. 무용 시간이 가까워오자 풍선은 다 터지고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전날 풍선을 사서 총연습 시간에 부는 연습을 했습니다. 어제는 바람이 빵빵하던 풍선이 지금은 쭈글쭈글 바람이 빠졌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가지고 놀다보니 빵빵 터지고 바람에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재빨리 풍선을 불어 두 개를 머리에 묶었습니다. 물건 밑에 있던 풍선 한 판을 꺼내 잘 보이게 진열했습니다. 문구점 아저씨가 풍선 있으면 달라고 왔습니다. 물건 밑에 감춰놓고 나도 이것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너도나도 모여들어 혹시 못 살까봐 묻지도 않고 풍선 몇 배 값을 던져놓고 집어갔습니다. 누구도 거스름돈 달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난감을 파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누구도 풍선을 팔지 않았습니다. 다들 풍선을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풍선은 단위가 작아 팔아봐야 별로 남는 게 없다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점심시간 바로 다음이 풍선 무용이어서 풍선을 팔다보니 점심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사과 사세요” 멜로디언 대신 내 목소리로

8월 초에 돌 지난 아들은 생전 처음 보는 운동회에 푹 빠졌습니다. 너무 좋아서 뭘 먹지도 않고 쉬지 않고 공을 찹니다. 시어머니는 사과 팔 생각도 못하시고 손주를 따라다닙니다. 앞집 아주머니도 너무 늦게 와서 세 접이나 되는 사과를 다 팔지 못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시어머니와 앞집 아주머니는 돌아가야 한다고 남은 사과를 나보고 팔라고 주었습니다.

낯가림이 심해 큰외숙모 외에는 잘 따르지 않는 아들입니다. 아들은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를 낯설어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미련 없이 따라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을 점심 대접은커녕 인사도 못했는데 휭하니 떠나갔습니다.

내 앞에는 시어머니와 앞집 아주머니가 준 사과만 수북이 쌓였습니다. “사과 사세요~ 사과 싸게 팔아요.” 그동안 멜로디언이 내 목소리를 대신했는데 나도 모르게 사과 사라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공짜로 생긴 사과라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파니 잘 팔렸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똘마니 부대 아줌마들이 다 같이 나무 밑에 모였습니다. 각자 팔다 남은 것을 내놓습니다. 삶은 밤도 있고 술빵도 한 조각 있습니다. 고구마, 사과, 과자… 없는 것 없이 풍성합니다. 모처럼 남은 것을 나눠 먹으며 올가을 운동회는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다고, 한 달 동안 열심히들 장사를 잘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평창초등학교 운동회가 남았지만 모두 평창학교 운동회는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평창학교는 시내에 있어 큰 가게가 많아 자기네들처럼 작은 가게는 가봐야 쪽을 못 쓴다고 합니다.

어떤 아줌마는 술빵을 쪄서 팔았습니다. 어떤 아줌마는 도토리묵에다 과자와 장난감도 팝니다. 어떤 아줌마는 고구마와 삶은 밤을 팔았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운동장 가게는 하나같이 희한한 조합이었습니다. 큰 밑천 안 들이고 집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누구는 산에 가서 주워오고 따오고 한 것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했습니다.

모두 좋은 가을 햇볕에 그을려 이마가 반들반들 빛이 납니다. 손톱 밑에는 까맣게 때가 끼었습니다. 누구는 잊어버리고 양말을 못 신고 왔는데 발이 너무 시리다고 하니 나눠서 한쪽씩 신는 아줌마들도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정들어 그런지 처음보다 훨씬 예뻐 보입니다. 하나같이 꼿꼿하고 야무진 아줌마들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요

춘삼이댁만은 끝까지 같이하지 못했습니다. 춘삼이댁은 남자처럼 덩치도 크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어서 똘마니 부대 보디가드 같았습니다. 소문으로는 춘삼이댁이 배를 팔았는데, 배를 너무 좋아해 한개 두개 깎아 먹다보니 하루에 배 한 접을 다 먹었답니다. 밑천이 바닥나 못 나왔다고 합니다. 똘마니 아줌마들은 내년 운동회 때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집에 와보니 열심히 공을 차던 아들은 열이 펄펄 끓어 병원에 갔다와서 이제 막 잠들었다고 합니다. 슛 골인 슛 골인 잠꼬대를 하며 잡니다.

전순예 45년생 작가·<강원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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