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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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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전부 사먹는 집에 냄비 파는 방법

요리 안 하는 집에도 우울증 앓는 집에도 각각의 처방으로 냄비를 팔고
등록 2022-07-21 12:42 수정 2022-07-22 13:41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옆집 아줌마 조카딸이 서울 목동 아파트 14단지에 사는데 조카사위는 중장비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옆집 아줌마는 조카딸을 소개해줄 테니 목동에 가서 요리강습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조카딸은 세 살 먹은 딸을 데리고 살림하는 주부인데, 무슨 요리강습이냐며 시큰둥한 표정을 했지만 그래도 이모 부탁이니 이웃집 아줌마들을 불러 모아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첨단 엄마가 돼 있었네

거기서 서른일곱에 시집가 소식을 모르던 첨단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첨단이 엄마는 신데라빵 장사를 하다가 나에게 넘기고 갔던 사람입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자마자 아들을 낳아 네 살이 됐답니다. 아들 이름은 첨단이랍니다. 티미(희미)하지 않고 무언가 최첨단을 달리며 살았으면 해서 최첨단이라 지었답니다.

내가 가져간 냄비가 첨단 제품이라고 “아줌마, 어떻게 이렇게 기발한 직업을 가지게 됐어요!” 하며 좋아했습니다. 강습이 끝나자 첨단이 엄마는 풀세트로 샀습니다. 자기가 앞으로 많이 소개해주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옆집 아줌마 조카딸은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결혼할 적에 밥 안 해먹기로 계약서를 쓰고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태껏 밥하지 않고 사먹으며 산다고 합니다. 옆집 아줌마는 자기가 저녁밥을 해줄 테니 집에서 먹자고 했습니다. 조리도구는 내 실습기를 쓰고, 조카딸네 부엌에서 음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옆집 아줌마는 자기가 시장도 봐주겠다며 먹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조카딸은 갈비도 먹고 싶고 된장국도 먹고 싶고 꽁치조림도 먹고 싶답니다. 5리터 압력솥에 갈비를 안치고 3리터 압력솥에 밥을 안쳤습니다. 작은 냄비에 된장국도 끓이고 중간 냄비에는 꽁치조림도 하고 호박볶음과 골뱅이무침도 했습니다.

둘이서 하니 금세 뚝딱 만들어 한 상 차렸습니다. 모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맛있다 맛있다 하며 허겁지겁 먹습니다. 세 살 딸은 말도 없이 갈비도 뜯고 입이 벌겋도록 골뱅이무침도 잘 먹습니다. 조카딸은 자기 딸이 하도 잘 먹으니 어이가 없어 들여다봅니다. 숫제 사먹으면 인간 꼴이 안 된다고 지금부터 집에서 밥을 해먹으라고 권했습니다. 옆집 아줌마는 돈도 절약되고 얼마나 좋으냐고 거들었습니다. 조카딸은 그렇게 시큰둥하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아줌마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제품을 다 팔고, 자주 와서 개인적으로 요리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주부가 김치를 사먹는다고 해도 욕먹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첨단이네 집에 요리강습을 여러 번 갔습니다. 첨단이 엄마는 날만 밝으면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습니다. 첨단이 또래 친구고 엄마고 마음 놓고 드나들었습니다. 늦게 난 아들이 이기주의자가 될까봐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나눔을 가졌습니다. 집안에서 항렬이 높은 손주딸이 서울대학에 다니는데, 아들을 서울대학에 보내고 싶어 본을 보라고 손주딸도 자기 집에 데려다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첨단 엄마가 쓴다니 너도나도

첨단이 이웃에는 연예인이 많이 살았습니다. 유명 코미디언도 있고 유명 탤런트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신발 벗겨 맨발로 마음껏 뛰어놀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탤런트네 예쁜 딸은 예쁜 옷을 입혀서 불고 털고 다녔답니다. “그렇게 키우면 시집가서 시집살이는 하고 살겠나.” 맨발 벗겨 모래밭에 그냥 집어넣으라고 합니다. 남자아이들은 저렇게 불고 털고 키우면 군대는 어떻게 가겠냐며 신발 벗겨 모래밭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라고 합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놀이터에 모여 구덩이도 파고 두꺼비집도 짓고 유쾌하게 놉니다.

첨단이 엄마는 놀던 아이들을 자기네 집으로 다 몰고 들어가서 음식도 뚝딱 잘 만들어 먹입니다. 그렇게 “우리 강원도 아줌마가 파는 냄비인데, 요술 같다”고 미리 선전을 많이 해놓았습니다. 그 덕에 목동 요리강습은 순조로웠습니다. 첨단이네 쓰는 것 보니 좋더라고 너도나도 샀습니다. 별로 힘 안 들이고 많이 팔았습니다.

첨단이 엄마는 별이 엄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별이 엄마 아빠는 아주 부잣집 외동아들과 외동딸인데, 둘 다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 가정이랍니다. 별이네는 아주 잘사는데 별이 엄마가 우울증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외동딸과 외동아들이다보니 양가 부모가 경쟁적으로 살림을 바꿔놓는답니다. 별이네 집에서 언제 요리강습을 한번 하자고 할 테니 아줌마가 별이 엄마를 만나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웃과 교류가 없는데, 첨단이하고 별이가 친구라서 자기랑만 가끔 만나 이야기한답니다. 요리강습이야 하겠지만 내가 의사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우울증을 고치겠나 했습니다. 첨단이 엄마는 별이 엄마한테 “별이네 집이 넓으니 요리강습을 해줘” 특별히 부탁해서, 별이 엄마가 큰맘 먹고 요리강습을 열게 해줬습니다.

별이네는 세 식구가 60평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아파트 거실은 아무것도 없이 휑하니 넓었습니다. 거실에서 별이가 마음 놓고 공을 차고 놀았습니다. 주방 장식장에는 각종 냄비세트가 딱지도 떼지 않은 채 진열돼 있었습니다. 별이 엄마, 첨단이 엄마, 나, 이렇게 셋이 요리강습을 했습니다. 마침 실로매틱이라는 미국 제품을 팔 때여서 자기네 집에 없는 냄비라고 샀습니다. 다음주 화요일에 와서 다시 한번 요리를 가르쳐달랍니다.

당시에 나는 강습이 있는 날만 회사 차를 쓰고 다른 개인 업무는 먼 거리도 버스를 타고 찾아다녔습니다. 매섭게 추운 날, 변변찮게 옷을 걸치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고생고생 찾아갔습니다. 별이네 거실엔 아주 멋진 가죽소파가 떡하니 있었습니다. 친정엄마가 장롱을 해주니까 시어머니가 소파를 들여놓았답니다.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이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려 했는데,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가구를 들여놓으니 별이 엄마는 너무 속상해 기가 넘어갈 듯이 보였습니다. “아줌마, 나는 살고 싶지도 않다”며 나를 붙들고 서럽게 서럽게 울었습니다.

살고 싶은 대로 과감하게 살아보라

추운 날 이렇게 일해야만 살 수 있는 내 처지에 비하면 별이 엄마는 호강에 겨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든 사람은 자기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한참을 울다 그친 뒤 별이 엄마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네는 남편 월급만 가지고도 충분히 살 수 있답니다. 양가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사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별이 아빠와 상의해 별이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과감하게 살아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고 봐야 하니 체면, 예의 이런 것 다 접어두고 살길을 찾아 별이 잘 키우며 살아보라고 권했습니다.

몇 달 뒤 별이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동 집을 전세로 주고 경기도 광명 신도시로 이사 갔답니다. 남편과 자기가 우리 맘대로 살겠다고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양가 부모에게 부탁하고 떠났답니다. “아줌마, 이제는 우울증약도 끊었어요.” 별이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언제 한번 요리강습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을 찾습니다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은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문방구에서 방판(방문판매)까지,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게 두려웠던 새댁이 사람들 앞에서 요리를 시연하고 명함을 돌리며 소개를 통해 냄비를 파는 세일즈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칼럼입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은 적 없고,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여러 팔 것을 바꿔가며 하루의 휴일도 없이 집안을 건사해간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절대적 노동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딸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바랍니다. 간략한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겨레21>은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모아서, 20세기 여성 노동을 재구성할 예정입니다. 전자우편 anyone@hani.co.kr로 보내주세요. 2022년 8월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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