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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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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사람이라 말보다 요리가 빨라요”

‘추라이’만 하다가 직접 해본 첫 요리강습
등록 2022-03-09 13:47 수정 2022-05-20 01:42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요리강습을 한번 하자면 회사에서 차를 지원받아야 하고 강사도 지원받아야 했습니다. 상계동에서 강의는 여러 번 했는데 성과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강사들은 아주 깔끔하고 예쁘게 차리고 다녔습니다. 강사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강습을 열었을 때 실적이 좋으면 자기가 잘한 것이고 실적이 좋지 않으면 늘 퉁퉁거렸습니다.

빡빡 닦은 냄비, 삿대질, 다발다발

애경유지 외판을 할 때 알게 된 고객 집에서 요리강습을 했습니다. 그날은 주최 쪽에서 풀세트를 구매했습니다. 같이 간 손 강사는 이 제품이 수세미로 빡빡 닦아도 검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요리했습니다. 다음날 그 집에서 오라고 했습니다. 어디 요리강습이라도 열어주려고 오라는 줄 알고 신나서 갔더니 “아줌마 닦아도 꺼먼 물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개뿔 빡빡 닦았더니 아주 시꺼먼 물이 나오더구먼” 합니다. 시꺼먼 행주를 한 뭉텅이 들고 눈이 있으면 이거 보라고 흔들어댑니다. “어디 사기 칠 데가 없어서 나한테 와서 사기를 쳐? 사기꾼 같으니.”

냄비에서 나온 까만 물은 연마제입니다. 처음 사용할 때 잘 닦고 쓰면 문제없는데, 강사가 조금 오버해서 설명한 것이 사달이 났습니다. 그 고운 새 냄비를 억센 수세미로 빡빡 닦았답니다. 나한테 한참을 숨도 안 쉬고 삿대질하며 침을 튀기면서 쉴 새 없이 다발다발 말합니다. 냄비 세트를 전부 문밖에 내놓더니 시꺼먼 행주도 획 던져놓고 “반품할 테니 아줌마가 책임져요” 했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혼자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아무 대책도 없고 맨손인데 어찌할 수 없어서 압력솥 두 개를 들어 저만치 옮긴 뒤 냄비를 옮겼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공중전화 부스까지 찾아가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회사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지금 차가 없으니 두어 시간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나무 밑 벤치에 냄비를 옮겨다놓고 머주하게(기운 없이 멍하게) 앉아 기다리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 차가 오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해서 눈을 껌벅거리며 먼 산을 바라보기를 네 시간. 그제야 차가 와서 냄비를 가져갔습니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강사는 애써 팔았더니 반품을 받아왔다고 많이 화냈습니다. 강사도 반품하는 아줌마처럼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강사들은 ‘새 냄비는 처음엔 식초를 한 방울 넣고 끓여서 부드러운 행주로 닦아 쓰세요’ 하던데 무슨 수세미로 빡빡 닦아도 괜찮다고 해놓고서 말입니다.

강사로 나선 입사 동기 이 여사

며칠을 쉬었습니다. 가족이 집에서 살림만 하라고 할 적에 그냥 집에 있을걸,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남들은 잘도 하던데 나는 왜 이리 무능하고 재주가 없는지 한탄스럽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 벅차고 힘든 세상임이 틀림없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쟤들이 크면 ‘우리 엄마도 뭘 한다고 하더니 그만두기도 잘하더라’ 하며 나를 닮을까봐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출근했을 때 입사 동기 이 여사가 제일 반가워했습니다. 내 눈에 이 여사는 세련되고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사도 애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여사도 손 강사한테 왕창 깨졌다고 합니다. “강사나 나나 다 냄비 장사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처럼 난리냐”고 했습니다. 더러워서 자기도 강사를 하고 말겠답니다.

며칠 뒤 이 여사가 자기는 강사로 일하기로 회사랑 얘기했답니다. 사장실에 찾아가서 “이 여사는 강사를 한다는 데 나는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사장은 “뭘 어떡합니까? 하면 되지” 합니다. ‘추라이’도 하고 강습도 하라고 합니다. 며칠 뒤 이 여사는 주방업계에서 유능하기로 소문난 에이전트를 영입했다고 했습니다. 이 여사 팀은 에이전트가 ‘추라이’를 잘하지, 본인 고객도 많이 있어서 한 달 내내 바쁘게 일하더니 곧바로 판매 1등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입사 동기라고 나를 많이 생각해줬습니다. 전 여사는 어디 아는 에이전트 없느냐고, 강사만 해야지 혼자서는 힘들다며 어디 사람이 있나 알아봐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언젠가 명함을 줬던 보험회사에 다니는 강 여사라는 분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삼성동에 있는 어느 보험회사로 오라고 했습니다. 강 여사는 보험 실적이 아주 좋은 팀장이었는데 내가 자기네 회사에 보험판매원 시험을 봐주면 자기네 회사가 있는 건물의 사무실마다 요리강습을 주선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시험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본업인 회사로 출근했다가 또다시 보험회사로 가서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한 달을 엄청 바쁘게 지냈습니다. 공부 시늉은 했지만 시험에 붙어서 보험회사에 입사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강 여사에게 보험에는 새로운 용어가 많고 어려워서 아무래도 합격하지 못할 것 같다고 엄살을 피웠습니다. 결국 시험에 떨어져서 내 체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강 여사는 내가 시험에 떨어졌는데도 약속대로 요리강습을 열어줬습니다.

“왜 그 말은 안 해” “아이참, 다시 합니다”

그때까지 나는 에이전트로 ‘추라이’만 하고 요리강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강 여사는 내게 강사를 데리고 오지 말고 직접 요리강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강 여사는 자기네 집에 냄비 살 사람을 다 불러놓았습니다. 친구들한테 “오늘 전 여사가 강사로 입문하는 날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사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떨지 말고 마음 놓고 강습하라”고 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요리해서 점심을 먹이려고 일부러 재료를 많이 준비했습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요리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덕션(전자기 가열 기구)이 처음 나온 때여서 실습용으로 가지고 다녔습니다. 인덕션 위에 휴지를 올리고 냄비를 얹어도 휴지는 타지 않고 요리가 되는 신기한 실습을 보여줬습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두 개와 인덕션까지 불 세 개를 놓고 요리하니 엄청 빨리 음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얼굴이 뻘게가지고 더듬거리며 “나는 강원도 사람이어서 말이 느려서 말보다 요리가 먼저 된다”고 엄살도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고 말도 잘하네” 하며 박수 치면서 경청해줬습니다. 한참 요리하며 설명하다보면 요리강습을 많이 봤던 어떤 사람이 “냄비 밑에 불이 있어야지 절대로 냄비 바닥 넘어가게 불이 붙으면 안 된다고, 이 냄비는 큰불과는 절대 이혼해야 한다던데, 그 소린 왜 안 해?” 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이참, 잊어버렸네” 하고 다시 설명했습니다.

강습이 끝나자 안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ℓ짜리 솥이 있는 사람은 5ℓ 솥을 하나 더 샀습니다. 딸내미 시집보낼 때 준다고 냄비 세트를 미리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파워 있는 강 여사를 만나서 요리강사로 데뷔한 첫 강습에서 대박이 났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 1945년생 작가가 작은 것들을 사고팔며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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