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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덕에 우리 집은 ‘미세’멀리즘

당근마켓 중독기 ① 노동의 여성화, 소비의 여성화, 거래의 여성화
등록 2021-04-05 07:12 수정 2021-04-09 01:47
도우리 제공

도우리 제공

나는 올해 초에야 지난해 설치해둔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을 사용했다. 직거래로 1kg짜리 덤벨을 현금 5천원에 바꿔 빵을 사 먹은 일을 계기로, 한 달 만에 ‘매너온도’(거래 후기와 매너 평가가 반영된 에티켓 지수)가 50°C를 넘을 정도로 중고거래에 열중했다. 두 달간 중고물품 판매는 55건, 액수는 34만원이었다. 들인 품에 비해 벌이는 시원찮았다.

당근마켓 사용 초반에는 잘 입지 않는 옷 몇 가지만 올렸다. 그런데 내 옷들은 생각보다 ‘가격 방어’(시세가 떨어지는 정도)가 낮았다. 유니클로 브랜드가 대부분이었던 내 옷은 원가가 몇만원이고 상태가 좋아도, 5천원 아래로 가격을 낮춰야만 구매자가 나타났다. 반면 내가 사고 싶은 질 좋고 디자인이 예쁜 중고 니트는, 내 옷 다섯 벌은 팔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이 가격 차이를 메우기 위해 돈이 더 필요했다. 또 그전까지는 적당히 만족하며 입던 내 옷들이 초라해 보이면서, ‘수준’을 높인 물품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그러다보니 옷가지 거의 전부를 중고물품으로 올렸다. 나중에는 옷걸이나 모아둔 봉투, 시나몬 스틱 소분한 것까지 ‘영끌’해서 판매 목록에 올렸다. 이것도 모자라 판매 확률을 높이려 다른 중고거래 플랫폼들도 설치하고, 책 중고거래 플랫폼 ‘알라딘’에 개인 판매자로 등록했다. 결국 지금은 계절별 옷이 5개 내외가 됐고, 남은 물건들도 소유가 아닌, 언제든 팔아넘길 임시적 상태를 전제하고 사용 중이다. 나는 원래도 ‘미니멀리즘’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미세멀리즘’이 됐다.

당근마켓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비우는 재미’다. 비우면 재밌기는 하다. 없던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으니까. 내가 그 재미에 중독 수준으로까지 과몰입한 데는 실업급여 수급 중이라는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근로소득은 실업급여에 포함되지만, 중고거래로 번 돈은 그대로 추가 자산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당근마켓 주 사용자는 나를 포함해 3040 여성이라고 한다. 코로나19 확산에 삶의 온도가 급격히 얼어붙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서비스직 같은 대면 업무나 임시직에 주로 종사해 빠른 해고를 겪고, 돌봄이나 가사노동이 가중된 이들. 한마디로 가속화한 ‘노동의 여성화’ 타격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들이다. 노동의 여성화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성별적’ 특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개념이다. 계약직이나 저임금 일자리를 주로 여성이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게 폐업으로 매장 물품을 중고로 ‘급처’한다는 자영업자들의 현실과도 이어진다.

당근마켓 플랫폼의 초기 타깃이 신도시의 ‘육아맘’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근로소득자나 사업자에 비해 집에 머무르면서 중고 상품을 찾아내고, 사진을 연출하고, 잘 팔릴 만한 문구를 덧붙여 업로드하거나 직거래에 나서고, 발품을 팔 ‘시간’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중고거래의 증가세에는 신품 가격에 포함된 인건비나 임대료, 교환·환불 등의 서비스 비용을 ‘시간 비용’으로 기꺼이 치르는 사람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늘어난 상황도 있어 보인다. ‘노동의 여성화’에 맞물린 ‘거래의 여성화’ 같다.

그래서 최근 자주 들리는 중고거래 미담도 수상쩍다. 여기에는 매너온도가 99°C인 사람에게 다단계 팸플릿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빠질 수 없겠다.(3주 뒤 계속)

도우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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