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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온다,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지 않겠다

등록 2021-04-05 07:31 수정 2021-04-09 01:59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왼쪽)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가 일본 후쿠오카의 독립서점 아지로 앞에 나란히 선 모습. 쇼분샤(晶文社) 제공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왼쪽)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가 일본 후쿠오카의 독립서점 아지로 앞에 나란히 선 모습. 쇼분샤(晶文社) 제공

“미래에 죽음이 오리란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왜 그 미래의 죽음을 기준으로 지금을 생각해야 할까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이자 ‘우연성’을 연구해온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삶에 우연히 찾아온 질병을 마주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호스피스를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의사 말에 따라 주변을 정리하려던 그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온 건 2018년 강연에서 만난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45)의 말이다. “어쩌면 건강한 내가 당신보다 먼저 교통사고로 죽게 될지도 몰라요.”

미야노는 문득 깨달았다. “모두 똑같이 ‘갑자기 몸이 아플지’ 모르는 거구나. 그럼에도 눈앞을 보며 살아가는구나.” 그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멈추고 이소노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편지를 주고받자고 말이다.

다다서재 제공

다다서재 제공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이라는 기만

최근 출간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다다서재)은 죽음을 앞둔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가 2019년 4월부터 두 달여간 주고받은 스무 통의 편지를 실었다. 편지엔 ‘죽음이 온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오늘’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미야노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소노는 그런 그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삶, 질병,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대화는 만남과 이별을 수용하고, 삶과 죽음을 직면하며, 아픈 몸과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는 등 폭넓은 사유를 담아낸다.

삶은 죽음이란 정해진 운명 앞에서도 계속된다. 어쩌면 당연한 이 명제는 종종 잊힌다. 사회가 환자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이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개 환자 앞엔 단 하나의 길만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주변과 언제든 이별할 준비를 하며 환자로서 무기력해진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미야노의 편지엔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이러한 통념에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이 묻어난다.

“제가 ‘언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이라는 말에서 기만을 느끼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도착지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 도착지만 보고 지금을 살아간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생의 가능성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32쪽)

“‘암이 낫는다’와 ‘암이 낫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고 그 간극 속에는 갖가지 삶의 방식과 가능성이 있습니다.”(48쪽)

이처럼 미야노는 “암에 걸린 불운에 분노”하면서도 “그 불운에서 어떻게든 인생을 되찾아 스스로 인생을 일구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렇게 살아가는 덕에 그는 마지막까지 사유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는 등 “그런대로 충실한 인생”을 보내며 “스스로 인생을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야노는 2019년 7월 책의 서문을 쓴 뒤 출간을 채 보지 못하고 숨졌다. 향년 42. 이소노는 <한겨레21>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사람은 끝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미래를 상상하며 타인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곧) 미야노가 혼신의 힘을 쏟아 써낸 글”이라며 “독자분들에게 보이는 세계가 전과 조금 달라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고 전했다.

두 사람이 소통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미야노의 병세가 악화하자 이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편지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다. 환자와 보호자(비환자)의 대화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는 주제를 과감히 직면해 당사자의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소노는 물론 미야노의 글이 세계에 닿을 때까지 “절대로 죽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러한 대화는 역설적으로 아픈 몸(미야노)과 그렇지 않은 몸(이소노) 사이를 “단선적이고 단절된 관계”로 경직되게 만드는 대신, 더 깊은 상호작용을 만들어냈다. 형식적인 위로를 주고받거나 전문가들이 만든 ‘환자 소통 매뉴얼’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미야노를 ‘환자’란 정체성에만 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소노는 “소통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았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동적인 것”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는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병에 걸린 사람과 만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인터넷에서 그 병이나 환자와 관계 맺는 법을 살펴보곤 합니다.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 찾고 싶어’라고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이들의 대화는 우리가 ‘아픈 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도 반추하게 한다. 한국에선 아픈 몸으로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질병권’ 논의가 최근에야 시작됐다. 일본에선 여러 병에 걸린 당사자 모임을 중심으로 이런 논의가 좀더 활발하다.

예컨대 이소노는 “몇 년 전만 해도 장루·요루 환자용 공중화장실이 적었으나 지금은 도쿄도 내에서 제가 가본 거의 모든 공공시설에 이런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고 했다. 한국의 공공시설에선 이런 화장실을 찾기 어렵다.

또 “일본에는 ‘인지증’(치매, 치매가 ‘어리석다’는 한자어로 구성돼 있어 일본은 2000년대 초반 이를 ‘인지증’으로 바꿈) 당사자가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지역을 넓히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인지증’ 당사자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대중에게 전달하는 ‘인지증의 세계를 걷는 법’ 사이트도 그중 하나다. 치매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로 바라보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끝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타인과 마주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는 아픈 몸을 마주하는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이소노는 2020년 7월 미야노의 죽음 1주기에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종종 쓰던 공원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돌아오는 2주기에도 그럴 계획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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