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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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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네에 퍼트리는 B급 취향

포항·대구·서울 거쳐 다시 고향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양희연씨의 책방 창업기
등록 2022-05-15 14:55 수정 2022-05-17 06:48
경북 포항 북구에서 동네서점 겸 수제 디저트카페 ‘B급취향’을 운영하는 양희연씨와 그의 반려견 순돌이. 채혜원 제공

경북 포항 북구에서 동네서점 겸 수제 디저트카페 ‘B급취향’을 운영하는 양희연씨와 그의 반려견 순돌이. 채혜원 제공

2021년 봄, 첫 책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출간하고 전국 곳곳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모두 동네서점에서 열어준 북토크 행사 덕분이었다. 독자들과의 귀한 만남은 물론, 지역마다 동네 특색과 책방지기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을 방문하는 여정은 여느 여행보다 특별했다. 책방지기와 서점을 찾는 주민들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분위기가 저마다 아름다웠다. 어느 지역에서든 글쓰기모임이나 독서모임을 통해 비슷한 취향의 주민들이 동네서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 느슨한 모임을 엿보는 재미가 커, 새로운 지역을 방문할 때 동네서점에 들러 기념으로 책 한 권을 사는 것이 여행루트가 됐다.

첫 책을 들고 경북 포항을 방문하진 못했으나, ‘B급취향’이라는 서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서점 인스타그램(@b_ook_taste) 피드에 서로 다른 두 책방지기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과 함께 글이 올라왔다.

내겐 너무 답답했던 포항

“포항의 상징인 ‘달팽이책방(@bookshopsnail)’ 달팽이님이 B급취향을 방문해주셨어요. 오랫동안 달팽이책방을 동경해왔던 저는 성덕(성공한 덕후)입니다. 디저트는 물론 책도 여러 권 구매해가셨어요. 책방을 응원해주신다고 멀리 와주셔서 힘이 나요. 함께 오래오래 가요.”

포항의 또 다른 서점인 ‘지금책방(@yeonkkot123)’ 대표와 함께 찍은 사진도 발견했다. 포항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여성들끼리 서로를 응원하며 연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마침 <한겨레21> 통권호 ‘WRITERS’ 인터뷰를 통해 만난 희정 작가로부터 B급취향 서점지기가 포항뿐만 아니라 경북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온 청년여성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KTX 기차표를 사서 포항으로 향했다.

경상북도 동부권 중심도시인 포항은 대구와 부산보다 면적이 크다. 포항 남구에 있는 달팽이책방에서 북구에 위치한 B급취향으로 이동하려면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신도시인 북구 지역에 도착해 B급취향의 문을 열자, 책방지기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페미니즘, 채식, 사회주의, 퀴어, 동물권 등을 다룬 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수제 디저트카페 겸 책방이라 양희연(30) 책방지기는 직접 만든 레몬마들렌, 피낭시에, 각종 쿠키 등을 진열하고 그의 반려견 순돌이는 창가에서 볕을 쬐고 있었다. 희연이 경북 경주에 갔다가 유기된 순돌이를 발견하고 포항까지 데리고 왔다고 한다.

“평생 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찾다가 덜컥 B급취향을 열었지만, 사실 포항은 제게 언제라도 벗어나고 싶은 고향이었어요. 우스갯소리로 허수아비만 세워놔도 특정 정당이면 당선된다는 보수적인 지역이라 어릴 때부터 힘들었거든요.”

무엇보다 희연은 늘 외로웠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함께 울고 웃을 이웃과 친구, 동료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포항을 벗어나는 그의 첫 시도는 대구였다. 면적은 포항보다 작지만, 대구엔 포항의 약 5배에 이르는 인구가 사니 그만큼 다양한 사람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렇지 않았다. 희연에게 대구는 그저 ‘사람 많은 포항’으로 남았다.

나를 구하기 위해 만든 독서모임

대구에서 지내며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졌다. 졸업 뒤 서울에 있는 중앙노동조합 소속 활동가가 되면서 그 소원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도 같았다. 그는 영남 지역 노조를 관장하는 일을 맡으면서 서울과 대구, 울산, 경주, 포항을 오가며 지냈다. 하지만 노조 활동 안에서도 지역 사업장 이슈는 배제되기 일쑤였다. 언론 역시 서울 노조의 크고 작은 이슈는 밀도 있게 다루지만, 지역에서 일어나는 파업과 농성장 이슈는 화면 아래 짤막한 문장으로 보도하거나 이마저도 생략했다. 변방의 활동가들은 지쳐갔고,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늘 ‘어린 여자’로만 타자화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노조 일을 그만둔 뒤 희연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파트타임 노동자로 일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고 합격했다. 떠나려면 어느 정도 자금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며 지내던 중, 희연은 우연히 독서토론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모임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다. ‘이럴 바에 내가 독서모임을 만들자’고 희연은 결심했고, 포항 지역 여성들의 독서모임 ‘페미나’(FEMINA)를 탄생시켰다.

“페미니즘과 나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페미(femi)와 나(na) 단어를 합쳐 모임 이름을 지었어요. 어리다는 이유로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사회 이슈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던 지역 사람들을 생각하며 청년 동지들을 찾기로 한 거죠.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모임이었지만 2년간 꾸준히 모임을 이어왔어요.”

페미나 모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자 늘 꿈꾸던 커뮤니티와 네트워크가 포항에도 생겼다는 생각에 희연은 기뻤다. 모임 멤버들은 ‘포항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페미나’라며 그간 가정과 학교, 일터에서 겪은 가부장 중심 문화 때문에 속앓이해온 시간을 함께 나눴다.

‘B급취향’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열린다. 양희연 제공

‘B급취향’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열린다. 양희연 제공

캐나다행 접고 다시 고향으로

모임이 안정되면서 희연은 이곳을 두고 캐나다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예상치 못한 팬데믹 상황까지 겹치면서 그는 포항을 택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역에서 동지를 더 발굴하고 만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포항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써가고 싶어진 희연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점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청소년과 청년층의 빈약한 문화생활을 보완할 수 있는 공간, 잃어버린 진보적 가치를 되살리는 지역 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비싼 임대료와 불안한 미래, 불완전한 저 자신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지만,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새기며 일단 시작했어요!”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위해 희연은 2021년 10월, B급취향의 문을 열었다.

서점을 열기로 결정하고 희연이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위치였다. 달팽이책방이 남구에 먼저 자리잡고 있으니, 자연스레 북구로 동네가 정해졌다. 주변에 대학이 있고 신도시 구역인 만큼 젊은 사람이 많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 공간을 둘러보던 중 마침 카페였던 곳이 매물로 나왔다. 인테리어가 다 되어 있어 집기만 사면 되는 상황이었다. 계획보다 면적이 컸지만, 책장 때문에 너무 작은 곳은 계약하고 싶지 않았다. 모아둔 돈을 권리금과 보증금에 몽땅 투자했다.

책장을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취향대로 사회 비주류 담론을 다룬 책을 선별해 입고했다. 커피와 디저트를 만드는 일도 그간 카페에서 일한 경험으로 혼자 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세금 정산이었다. 책은 면세이고 카페 항목은 과세라 세금 처리가 복잡했다. 대전에 위치한 ‘우분투북스’ 등 유튜브를 운영하는 서점 관련 채널을 여럿 찾아봤고, 매출 자료를 자동 정산·집계해주는 포스(POS·판매시점정보관리) 기계를 들였다.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모인다

서점 문을 연 지 어느덧 반년. 희연은 큐레이터가 되어 서가에 책을 채우며 여러 번 읊조렸다. ‘이걸 알아보는 사람들이 와줄 거야.’ 그 기대는 현재 B급취향에서 동시에 운영되는 3개의 독서모임으로 현실이 됐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꾸준히 발걸음해주고 있다. 차별과 혐오, 여성창작자 읽기 등 모임마다 다른 주제로 이뤄진 책을 읽고 토론한다. 지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나누고 글로 쓰는 페미니즘 모임 ‘써,글’도 새로 만들어졌다.

희연은 매일 커피와 디저트를 만들며 마음껏 책 읽고 독서모임 하는 날과 달리, 비싼 임대료 걱정에 숨이 턱 막히는 날도 잦다고 말했다. 서점 운영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순간마다 희연은 투표용지를 떠올린다. 지역 소도시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선거 때마다 거대 양당이 아니고서는 선택지가 없는 투표용지를.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투표용지를 보며 절망하지만, 끝내 희망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얼굴도 함께 떠올린다.

독서모임 회원들, 먼 곳에서 부러 찾아와 매상을 올려주는 포항 독서모임 ‘북서풍’과 포항여성회, 일부러 B급취향에서만 책을 사는 경북 성주 소성리 활동가, 한 달 문화비로 받는 3만원을 B급취향 도서 구매로 써주는 옛 노조 동료들, 책방지기가 선택한 책을 보내주는 도서구독서비스 ‘북꾸러미’ 신청자. 이 외에 B급취향을 통해 만난 얼굴들을 떠올리며 희연은 휴일 없이 매일 정오에 책방 문을 연다.

“많은 분이 각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음을 보태주고 있어요. 포항에 계속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런 공간이 없었을 뿐이지, 실은 서로가 연결돼 있다고 믿어요. 그 믿음으로 오늘도 서점을 지킵니다.”

포항=채혜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chaelee.p@gmail.com

*바깥에 사는 사람: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가서 지역살림을 꾸리고 공동체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에서, 길 위에서 그들이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칼럼 제목은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년) 수록작에서 따왔습니다. 4주에 한 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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