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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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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만드는 일, 말에 풍경을 만들어주는 일

말의 힘은 그 말에 맞는 풍경에서 와… 이야기 무대인 풍경을 함께 지어야 말의 의미 넘어 울림까지 전할 수 있어
등록 2023-09-16 02:13 수정 2023-09-21 06:54
전북 완주 화암사 우화루의 모습. 한겨레 자료

전북 완주 화암사 우화루의 모습. 한겨레 자료

학생들과 함께 올가을 문화탐방의 사전답사를 위해 오랜만에 전북 완주 화암사를 찾았다. 이 절에 오르는 길은 절집으로 가는 길 중 좋아하는 곳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리 험하지 않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은 오래된 풍경이 펼쳐진다. 절집에 오르면 “조용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어서 오라고 반기지도 않고, 빨리 가라고 배척하지도 않는다. 안도현 시인이 “잘 늙은 절 한 채”라고 말하며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고 노래한 절이다.

잘 늙은 극락전과 우화루가 들려주는 말

화암사는 내게 특별한 곳이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나에게 말에 풍경이 있음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난처한 일을 겪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됐는데 중간중간 조금씩 엇나가면서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됐다. 조금씩 엇나간 그 과정 전체에서 내가 책무를 져야 하는 직접적인 담당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동체는 나에게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물었다.

원래 일은 저지른 사람보다 수습하는 사람이 더 잘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책임을 묻기도 일을 저지른 사람보다 수습하는 사람이 더 쉬웠다. 내가 한 일도 아닌 것에 비난받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황당했지만 말이다. 책임이란 말이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지 깨닫기도 했다.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전체를 향한 섭섭함과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곁에 있던 친구가 바람이나 쐬자며 나를 데리고 온 곳이 화암사였다. 약간 숨이 찰 만큼 걷는 길이었다. 가며 읽은 안도현 시인의 글처럼 잘 늙은 절이, 이대로 잘 늙다가 어느 날 스르륵 조용히 사라질 것 같은 절이 있었다. 오래 걸리지도 않지만, 눈을 돌리는 곳에 폭포가 있었고 계곡이 있었다. 두꺼운 이끼가 낀 바위가 있었다.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며 생긴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조금씩 마음이 평화로워지며 내려오는 길에 친구가 “이 길을 너하고 같이 걷고 싶었어”라고 운을 뗐다. “이 풍경을 봐. 인간들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 세상사 얼마나 보잘것없고 시시하니.”

흔한 말이었다. 아마 누구나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들으면 같이 분노하고 공감하며 할 수 있는 흔한 말이었다. 그러나 뻔한 말이라도 어떤 장소에서 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짐을 그때 경험했다. 친구의 말은 화암사 오르는 길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절집에 오르며 읽는 안도현의 시와 딱 호흡하는 말이었다. “조용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에 딱 맞는 말이었다. 잘 늙은 극락전과 우화루가 딱 들려주는 말이었다. 의미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풍경과 어우러져 어지럽힌 마음을 돌려놓는 말이었다.

그날 알게 됐다. 말에는 그 말에 맞는 풍경이 있음을. 말은 풍경에 따라 달라지고, 말의 힘은 풍경에서 오고, 가장 아름다운 말은 풍경에 맞는 말임을 알게 됐다. 친구는 술 한잔 사주며 저 말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술집에서 “야야, 잊어버려. 인간사 별것 있냐? 한잔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서울에서 산책하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할 수도 있었다. “어쩌겠냐. 잊어버려라. 세상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 각각의 장소에 따라 친구의 말은 문장도 달라졌을 것이고, 어투도 달라졌을 것이고, 톤도 달라졌을 것이고, 말하는 속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말은 풍경에 맞춰 말해지고 풍경과 어울려 다른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의미의 말이더라도 장소에 따라 다른 생각과 방향을 보게 한다. 친구는 나에게 저 말을 들려주고 싶었고, 그 말에 가장 맞는 장소를 찾았고, 굳이 거기 갈 기회를 만들어 데리고 갔다. 지나가는 것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작하도록 말이 마음을 흔들고 울릴 수 있는 장소에.

풍경의 힘 보여주는 <집이 없어>

이날의 경험으로 나는 말하고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상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잘 고르는 것만이 아니라, 말에 풍경을 만들어주는 것임을 배웠다.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글/말에 온 힘을 다 쏟는다. 이 말이 옳은지, 논리적인지, 이전에 한 말과 일관성이 있는지, 제대로 표현하는지,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 그 말을 전달하는 적절한 사례인지 등 말 자체를 고르는 일에 집중한다. 누구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건 적과 대결하기 위해서건 말 자체에 집중한다.

대화를 넘어 이야기를 만들 때는 더 그렇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도 그렇고 목적도 분명한 ‘말걸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며 주고받는다. 이 주고받는 말이 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사람이 하는 말은 상대가 하는 말에 촉발된다. 화자가 이렇게 말했기에 그 말을 받는 사람은 거기 딱 맞는 저 말을 해야 한다. 연극에서 쓰는 표현대로 하면 상대가 받을 수 없는 말을 하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다.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이고, 이 말걸기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결정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말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딱 맞는 말을 고르는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말에만 초점을 맞추면 말에 힘을 부여하는 풍경 만들기를 놓칠 수 있다. 연극으로 본다면 말과 말하는 사람만 있고 그들이 서 있는 무대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어떤 무대 위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배우나, 저 말과 저 말을 하는 배우를 어떤 무대 위에 세워야 이야기가 될지를 고민하지 않는 연출이 제대로 된 이야기-연극을 만들 리 만무하며 그 이야기가 관객에게 제대로 된 말‘걸기’일 수 없다.

풍경, 즉 이야기의 무대가 있어야 말이 의미 전달만이 아니라 그 총체적 분위기까지 구축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의 대표적인 예가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에서 주완이(그림에서 선 인물)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 컷이다. 주완이 어머니(그림에서 앉은 인물)는 전업주부다. 엄마는 아들의 방을 매일같이 청소하고 정리한다.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끊임없이 들어간다. 이 컷 직전에 참다못한 주완이가 엄마에게 따지자 “엄마가 자식 방 치우는 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며 “누가 널 키웠는데”라고 말한다.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의 한 장면(그림). 네이버웹툰 갈무리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의 한 장면(그림). 네이버웹툰 갈무리

이야기를 읽으며 당연히 독자는 주완이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다들 어릴 때 자기 사생활과 충돌해본 경험이 있으므로 주완이 엄마가 정말 너무하고 내가 주완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겠다고 생각하며 엄마에 대한 비난과 주완이에 대한 감정이입은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장면이 등장하면 감정의 선이 바뀐다. 여전히 엄마가 잘못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저 집에서 엄마도 참 안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야기를 보는 독자의 시야가 넓어진다. 둘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무대이자 세계인 ‘집’으로 말이다. 둘 중 한 편을 넘어 그 둘이 있는-있을 수 없는- ‘세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제야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집이 없어>인지 다시 한번 환기된다.

“그럼 엄마가 이 집에서 뭘 해?”란 말에 맞춰서

이 컷 연출을 살펴보자. 작가는 엄마의 “그럼 엄마가 이 집에서 뭘 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의 뜻을 넘어 저 집의 상태, 저 집에서 엄마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느끼도록 말에 풍경을 입혔다. 먼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은 희미하게 처리됐다. 원근법 때문이 아니다. 엄마는 이 집(house)을 먼지 하나 없이 치우고 또 치우지만 정작 저 집은 집(home)으로서는 모호하다. 게다가 가족의 정체성이 흐릿한 사진에서조차 엄마는 잘려 있다. 저 집의 유대는 ‘극성스러운’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에게만 있다.

“그럼 엄마가 이 집에서 뭘 해?”라는 말의 쓸쓸함을 더하기 위해 집의 천장은 의도적으로 높게 잡았다. 한국 아파트 중에 저렇게 높은 천장을 가진 집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말풍선을 천장의 선에 절반을 걸쳐 위로 더 높게 잡음으로써 엄마의 말이 공허하게 울리는 효과를 내고 있다. 집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 밖에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은 엄마는 앉아 있고 항의하는 주완이 옆엔 문이 있다. 저 문이 어디 방문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든 밖으로 나가거나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와 집에 갇힌 존재 사이의 대비가 일어난다. “그럼 엄마가 이 집에서 뭘 해?”라는 엄마의 말에 딱 맞는 무대다. 딱 맞는 무대이기에 엄마의 말은 의미를 넘어 울림이 있다. 덕분에 독자는 말을 넘어 그 말을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저런 장면을 만들고 싶어 한다. 말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말에 풍경이 있고, 풍경이 있기에 독자가 말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세계에 있는지 보기를 바란다. 이런 풍경이 있는 장면은 만들기 쉽지 않다. 풍경에 공들여야 하는 만큼 물리적으로 시간이 들고, 시간이 드는 만큼 이야기의 진행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한 회에 80~120컷을 그려야 연재 분량을 맞출 수 있는 현재의 이야기 ‘공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읽는 이야기, 우리가 하는 말에서 풍경은 점점 더 없어지고 있다. 반면 말 자체는 매우 날카로워지고 있다. 따라서 말 한마디 한마디는 조심스럽게 해야 하지만 정작 그 말에 어떤 풍경을 입힐지, 말에 어울리는 풍경이 무엇인지에는 무뎌지고 있다. 장소에 맞지 않게 말하고 말에 맞는 장소를 애써 찾지 않는다. 이야기는 점점 자극적이 되고 말은 점점 날카로워지지만, 이야기와 말은 점점 빈약해진다. 말의 공간은 후끈 달아올라 결론과 요점만 남기고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말과 이야기의 품격을 형편없이 떨어뜨렸다.

사라지는 풍경, 날카로워지는 말

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장소와 풍경에 공들이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혹은 없는지), 내 말이 어떤 풍경을 파괴하거나 만들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말은 정의로우나 그 말이 짓는 풍경은 지옥일 수 있다. 그 풍경이 정말 내가 말로 만들고 싶은 세계인가? 아니라면 말하기에만 열을 내기보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계에 걸맞은 풍경을 짓는 말을 찾아야 한다. 그게 테리 이글턴이 저서 <비극>에서 말한 “복구 불가능한 상실을 포함하지만” “탄식에 한 가닥 희망을 섞어”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더 나아가 “인간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고양”하는 말의 자리가 아니겠는가.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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