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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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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생물학] 자궁, 신체와 분리돼 존재하는 기관

등록 2020-09-05 01:56 수정 2020-09-09 06:18
미국 뉴욕 놀이동산 코니아일랜드의 아기 인큐베이터 쇼 40년 역사를 다룬 책 <코니아일랜드의 기적>.

미국 뉴욕 놀이동산 코니아일랜드의 아기 인큐베이터 쇼 40년 역사를 다룬 책 <코니아일랜드의 기적>.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 중 하나는 각자가 상상하던 장면을 시각 이미지로 전달한다는 것이지요. 잘 만든 영화 속 장면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나 줄거리보다 더 오래 뇌리에 각인돼 큰 울림을 줍니다. 제게도 인상 깊게 본 영화의 몇몇 장면이 사진처럼 찍혀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9년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Matrix)에 나온 인간 배터리였습니다. 강한 인공지능이 지구를 장악한 시대. 인간의 쓸모란 겨우 그 몸에서 자체 발생하는 생체 전기를 기계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살아 있는 배터리 정도로 인식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커다란 고치처럼 생긴 인큐베이터 안에 태아처럼 양수에 둘러싸인 채, 인공지능이 뇌에 직접 제공하는 환상(매트릭스)에 갇혀 스스로는 살아 있다고 믿은 채 나비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가 그린 미래 세계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이었습니다.

당시 이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매트릭스 속 ‘고치’가 제게 주었던 느낌은, 인간에게 ‘자궁’의 존재는 그 자체만을 따로 몸 밖에서 키워내도 원래 기능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생체기관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리되면 더욱 자유로워지는

오랜 진화의 산물인 우리 몸은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대개 기능적 의미가 있으며, 대개 이들은 우리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그 의미까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심장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수정 후 5주께부터 박동하는 심장의 펌프질이 단 몇 분이라도 멈춘다면, 아주 드문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미래는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심장도 개체의 몸에서 떨어져나오면 단독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사람 몸에서 떨어져나온 심장이 의미 있는 유일한 순간은 다른 사람의 몸으로 이식될 때, 즉 다른 몸 안으로 유입되는 경우뿐입니다.

이처럼 대개의 신체기관은 몸 안에 있을 때만 기능하며 그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자궁은 다릅니다. 에스에프(SF)적 상상력을 다룬 작품들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몸과 분리돼 기능하는 자궁, 즉 인공자궁을 다뤘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아이들은 통제된 인공자궁 속에서 태아기 시절부터 자신들의 계급과 사회 역할에 맞도록 약물 처리와 세뇌 교육을 받고 태어납니다. 스칼릿 조핸슨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한 영화 <아일랜드>에선 복제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인공자궁이 언급됩니다. 클론의 대량생산을 위한 인공자궁은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클론 부대를 만들기 위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대중문화에 신체에서 분리돼 단독으로 존재하는 인공자궁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개조와 세뇌, 혹은 대량생산의 전제 조건으로 일종의 ‘아기 제조 공장’으로서 자궁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자궁은 인간의 아기를 보잘것없는 몇 개의 세포 덩어리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받는 한 명의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는 특이한 기관입니다. 오히려 신체에서 분리할수록 통제하기 쉬워지므로, 유전자 재조합된 맞춤아기나 복제인간을 다루는 경우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것보다 파생되는 문제가 적어집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궁은 여성의 몸과 떼어내서 존재할 수 없고, 여성에게 자궁은 생존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 신체기관입니다. 아기를 낳지 않으면 평생 별다른 이용 가치가 없는 기관임에도, 자궁 자체가 여성이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묘한 딜레마 상황에 놓여왔습니다. 생물학적 기관인 자궁이 없어도 생물학적 생명 유지에는 지장이 없지만, 그 자궁이 없으면 여성이라는 사회학적 생명은 심각하게 위협받습니다. 이는 결코 유쾌한 감각을 주지 못하는 월경이라는 생리 증상을 그저 참고 견디는 게 능사라고 은연중에 강요받는 것에서-이는 문화권에 따라 드러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일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불결하고 부정한 것으로 치부돼 터부시되는 것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기도 합니다-, 폐경 여성을 여성성이 제거된 중성 내지는 유사남성(폐경 여성에게는 여성호르몬이 안 나오는 대신 남성호르몬이 늘어나 남성스러워진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폐경 여성에게서 남성호르몬 농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으로 여기는 것도 생물학적 기관인 자궁이 사회적 의미로 더 크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1909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의 ‘인큐베이터 쇼’. https://99percentinvisible.org/episode/the-infantorium/

1909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의 ‘인큐베이터 쇼’. https://99percentinvisible.org/episode/the-infantorium/


과학박람회장의 ‘아기 부화장’

자궁의 생물학적 용도에 좀더 집중해볼까요? 자궁의 생물학적 용도는 인간의 어린 개체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행동-폐로 숨쉬기, 입으로 먹기 등-을 자력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궁은 일종의 환경으로 기능하기에, 이런 환경을 대치할 수 있는 과학적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근대 이전, 미숙아(출생 체중 2.5㎏ 이하의 저체중아와 재태기간 37주 미만의 이른둥이를 통칭하는 말)로 태어난 아기들은 별다른 처치를 받을 수 없어, 미숙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이런 아기들을 구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안한 사람이 프랑스 의사 에티엔 스테판 타르니에(1828~97)였습니다. 그는 미숙아를 살리려면 깨끗한 곳에 격리함과 동시에 체온을 잃지 않도록 따뜻하게 유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병아리를 인공 부화하는 기계였습니다. 달걀은 어미 닭이 따뜻한 체온으로 21일 동안 품어주면 완전한 병아리가 되어 알에서 깨어납니다. 이 원리를 응용해 그는 유리 덮개가 달린 나무상자에 아기를 넣고, 나무상자 아래쪽에 뜨거운 물병을 넣어둬 상자 내부가 늘 따뜻하고 습하게 유지되도록 신경 썼습니다. 별다른 의료 장비가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뜨거운 물병 상자’만으로도 미숙아 사망률을 28%나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일찍 태어난 아기들의 상당수는 체온 조절 미숙으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인큐베이터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되지만, 인큐베이터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들기에 이를 확산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폴란드 출신 의사 마틴 쿠니(1869~ 1950)는 이 아기들을 살리기 위해 다소 기괴한 발상을 해냅니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는 과학의 힘을 만방에 알리는 과학박람회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의 과학박람회를 돌아다니며 인팬토리엄(Infantorium) 혹은 ‘아기 부화장’(Baby Hatchery)이라는 이름으로 인큐베이터를 설치해, 그 안에 미숙아들을 넣어두고 이 연약한 아기들이 작은 상자 안에서 무사히 자라나는 모습을 대중에게 돈을 받고 공개했습니다.

‘인큐베이터 쇼’가 준 영향

각종 신체 기형을 가진 이들의 퍼포먼스를 프리크쇼(Freak Show)라 하여 즐기고,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기괴한 생명체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던 당시 사람들은, 아직 세상과 맞서기에는 너무나 작고 섬세한 아기들이 상자에 담겨서 생명의 끈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기 위해 관람료 25센트를 기꺼이 낼 용의가 있었죠. 이후 ‘인큐베이터 쇼’는 유행처럼 번졌고, 심지어 미국 뉴욕 코니아일랜드 놀이공원에서는 이를 상설 전시장으로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아기들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 비윤리적 행위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당시 아기들 대부분은 구빈원이나 자선병원에 버려진 미숙아로 그대로 두면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이 내는 관람료는 미숙아들을 살리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관람객의 관심과 입소문은 인큐베이터 시설을 더욱 개선하는 데 일조했기에, 논란의 와중에도 이 쇼는 지속할 수 있었지요. 또한 쿠니 박사는 미숙아를 구경거리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큐베이터 속 아기들을 간호사들이 어떻게 돌보는지를 공개해 많은 부모와 의료진에게 아기는 그저 ‘크기만 작은 인간’이 아니며, 환경을 정비하고 애정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돌보는 손길을 제공해야 제대로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하는 용도로 이 시설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논란 속에서도 코니아일랜드에 설치된 인큐베이터 쇼장은 1903년부터 1943년까지 무려 40년 가까이 지속했고, 이 시설을 통해 생명을 구한 아기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 재생산을 통해 유전자의 번성을 담당하는 생존 기계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 때문일까요. 재생산에 관련된 신체기관들의 경우, 그 기관의 생물학적 특성보다는 거기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더 크게 해석하는 일이 많습니다. 여성에게 자궁과 가슴이 그렇고, 남성에게 고환과 음경이 그렇듯이 말이죠.

생물 기관의 사회적 의미가 커질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크고 작은 고민과 충돌이 이들 기관이 지니는 생물학적 문제보다는 사회적 의미 속에 생겨나는 일이 더 잦습니다. 사회적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역시 사회적 동물이고, 그 사회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회적 의미로 인한 문제가 오히려 우리 생존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이를 한 발짝 물러서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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