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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

‘인간 대 로봇’ 아닌, 인간과 로봇 노동자의 소외 문제 다룬 소설 <디 임플로이>
등록 2024-03-16 05:11 수정 2024-03-20 01:31
‘살아 있으나 완전히 인간은 아닌 존재’는 미래 사회의 상상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1968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살아 있으나 완전히 인간은 아닌 존재’는 미래 사회의 상상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1968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인간이 창조했으나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존재는 오랫동안 작가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왔습니다. 인간에 대한 반란은 가장 극적인 형태입니다.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은 작동을 중단시키려는 엔지니어를 살해합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는 너무나 유명하고, 로버트 해리스의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알고리듬 VIXAL은 세계 금융시장을 파국으로 몰아갑니다. 이 모든 것의 원형은 200여 년 전 메리 셸리가 상상한 인공생명체 프랑켄슈타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22세기, 어느 직장에서

올가 라븐의 소설 <디 임플로이>도 무대와 인물 구조는 이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습니다. 무대는 22세기의 우주선 ‘6000호’입니다. 근무 직원 절반은 인간이고 나머지 절반은 ‘인간형’(humanoid)입니다. 인간형은 룬드 박사가 백합 봉오리처럼 생긴 보라색 생체물질 포드에서 배양한 인공생명체입니다. 이 소설은 인간형의 인간에 대한 살인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영어 ‘employee’를 본문에서는 직원으로, 제목에서는 그냥 임플로이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근로계약을 맺고 노동하는 이를 일컫는데 한국어 공식 표현은 ‘피용자’이고 상대어는 ‘고용주’입니다. 부제는 ‘22세기, 어느 직장에서’입니다. ‘인간 대 인간형’의 갈등 구조를 담은 과학소설이면서, ‘피용자 대 고용주’ 문제를 제목에서부터 드러낸 노동소설이기도 합니다. ‘노동 대 자본’의 격렬한 대립이 아니라 22세기 직장에서도 여전한 일하는 이들(인간이든 인간형이든)의 소외가 중심축입니다.

인간형을 만든 동인은 비용과 편익입니다. 인간 노동자 한 명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20년이 필요하지만, 인간형은 18개월의 배양 기간만 확보되면 만들 수 있습니다. 교육기간을 포함해도 2년이면 노동현장에 배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내구성도 더 좋고 업데이트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생체 종료시 기억을 다운로드해 다른 신체에 재-업로드할 수 있어 사실상 죽지 않고 재생되는 존재입니다.

미래가 없는 인간은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매여 있습니다. 가장 그리운 것은 쇼핑이라고 합니다. 쇼핑을 하면 멍하니 생각이 없어지는데, 우주선에선 쇼핑 할 수 없으니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은 슬픔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때때로 덜 외롭고 덜 인간적이었으면 바라기도 합니다. 인간형에 견줘 힘과 지구력이 모두 약하지만 인간은 가끔 맡은 일을 완수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인간이 일하기 싫다고 투덜대는 경우에도 일하도록 만들어진 인간형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면 인간은 ‘개인은 각자 하는 일 이상의 존재’라고 인간형에게 이야기합니다.

프로그램의 일부인가 저절로 떠오른 것인가

어느 날 ‘새로운 발견’이라는 행성을 탐사하던 중 직원들은 ‘그 물체’를 발견하고 우주선으로 옮깁니다. 그 물체와 접하면서 직원들은 변화해갑니다. 한 인간형은 그 물체에서 오크나무에 낀 이끼 향을 느낍니다. 만들어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을 주입했고 그중 하나가 이 이끼 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끼를 만지는 느낌은 주입하지 않았는데, 손가락은 희미하게 이끼를 매만지던 감각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조사위원에게 묻습니다. ‘이것도 그 프로그램의 일부인가요? 아니면 저절로 떠오른 건가요?’ 인간형들은 프로그램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까지 스스로 나아가는 것일까요?

윤리적·경제적 측면에서 불필요하기 때문에 생식기관은 인간형을 만들 때 제외했지만, 그 물체를 바라보면서 성욕을 느낍니다. 그리고 조사위원에게 자신이 다른 인간형에 비해 ‘지나치게 살아 있는’ 존재냐며 따집니다. 감정 반응 패턴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된 한 인간형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라면, 그 문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주장합니다. 점점 더 회사가 자신들을 점검하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저 물건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점검 결정 회의에 인간형 대표의 참석을 요구합니다.

자본 또는 그 대리인인 이사회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사회가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통해 분위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조사 목적은 ‘그 물체’와 관련한 직원들의 작업 방식, 물체가 직원에게 미친 영향을 조사해 실적 증감, 직무 이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 습득 정도를 파악해 생산 결과에 미친 효과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진술서를 보면, 위원회는 인간 직원들에게 인간형 직원 감시를 요구했습니다. 특히 인간과 인간형 사이에 깊은 사랑 또는 우정의 감정이 있는 경우 이를 활용했습니다. 일부는 협력했지만 일부는 보고를 누락했습니다. ‘친구를 배신한다는 게 제 일터를 배신하는 것보다 더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위원회는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인간형의 작동을 중단시키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6000호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그 물체’를 지키기 위해 모든 승무원을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인간 직원은 다 사망하겠지만, 인간형 직원은 기억을 일부 삭제한 채 재-업로드할 것이기 때문에 큰 손실은 아닙니다.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진술서

소설은 형식 면에서 특이하게 조사위원회가 직원들을 면담하고 수집한 진술 기록으로 구성됐습니다. 직원 각각의 진술 기록은 이름 대신 숫자로 표기됐는데 그나마도 순서가 다소 틀어져 있습니다. 어떤 혼란 때문에 진술서 뭉치가 흐트러진 것을 급하게 수습한 것으로 보입니다. 진술자가 인간인지 인간형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진술은 제각각입니다. 한두 줄에 그치는 것부터 두세 쪽에 이르는 꽤 긴 글까지 분량도 다양하고 심사위원회에 대한 적대감과 친밀감도 드러납니다. 분석, 느낌, 제안과 호소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일부 표현은 삭제됐습니다. 딱딱한 형식의 진술서가 시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디 임플로이>는 작은 문고판형에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소설입니다. 낯선 형식 때문에 앞의 서너 쪽 정도는 ‘이게 뭐지’ 하며 읽고 곧 속도가 붙어 금방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한 번 더 읽으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 읽을 때도 좋았지만 두 번째 읽으면 ‘아아’ 하면서 새롭게 보이는 게 많이 있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다. 2주마다 연재.

 
디 임플로이

디 임플로이


올가 라븐의 <디 임플로이>는

올가 라븐은 1986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덴마크 작가입니다. 2008년 시인으로 등단했고, 2015년 첫 소설 <셀레스틴>을 발표했습니다. 2018년 덴마크의 조각가 레아 헤스텔룬이 전시회 팸플릿에 들어갈 짧은 글을 라븐에게 부탁합니다. 라븐은 헤스텔룬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고 소개문을 훌쩍 넘어서는 소설 <디 임플로이>를 완성합니다. 소설에서 ‘그 물체’라고 묘사된 것은 헤스텔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또 헤스텔룬은 올가의 글에 영향받아 몇몇 작품을 추가했습니다. 두 예술가 모두 ‘살아 있으나 완전히 인간은 아닌 어떤 것’에 끌려 문학과 미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디 임플로이>는 2020년 덴마크어로 출간됐고, 2021년 인터내셔널 부커상과 2022년 어슐러르귄상 최종 후보에 들었습니다. 2023년 다람출판사에서 이수현의 번역으로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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