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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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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하늘에서 내리지만 참변은 아래에서부터 겪는다

죽음이 공통이라면 삶에도 공통이 있어야 한다
결코 ‘공통’일 수 없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붙이고 ‘공동의 노력’을 해야
등록 2022-08-18 15:14 수정 2022-08-19 01:53
2022년 8월8일 밤 내린 폭우로 고립돼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 반지하 가구(오른쪽 출입문)로 들어가는 계단이 이튿날인 8월9일 오후까지 물에 잠겨 있다. 박승화 기자

2022년 8월8일 밤 내린 폭우로 고립돼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 반지하 가구(오른쪽 출입문)로 들어가는 계단이 이튿날인 8월9일 오후까지 물에 잠겨 있다. 박승화 기자


*제1423호에서 이어집니다.

‘아픈 부모님 돌보는 저를 효녀라고 부르지 마세요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347.html

이런 비는 처음이었다. 경기도 남부의 학교에서 교사들과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 현상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다녀오면서 만난, 2022년 8월8일 경기도와 서울을 집어삼킨 ‘집중호우’는 지금까지 만난 호우와는 격을 달리했다. 경기도 광명을 지날 때는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마침 서울 관악구 도림천이 범람한다는 소식에 서부간선 지하도로로 들어설 때는 2021년 중국 정저우에서 내린 폭우로 지하차도가 잠겨 수백 명이 숨진 사건이 떠오르며 ‘이 길로 가도 되나?’ 하는 생각에 섬뜩함을 느꼈다.

무엇이 지금 ‘공통’인가

아직 “기후위기는 별것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점차 많은 사람이 우리가 적어도 기후와 관련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기후위기야말로 ‘우리 공통의 운명’이라는 자각이 퍼지는 것이다. 그 ‘우리’가 누구이든 이것이 정말 공통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이 위기에 대처하는 일은 ‘공동의 노력’이어야 할 것이다. 공동의 노력 없이 운명이 된 재난-죽음이 아니라 삶을 새로운 ‘우리’의 공통으로 만들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난-죽음에 대처하려면 ‘공동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이 지금 ‘공통’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공통이 된 것과 공통이 돼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공동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건 죽음이 아닌 삶을 위한 공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고통 분담’이라는 이름 아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통이 삭제된 공동에 대한 강조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럼 인간에게 무엇이 공통됐는가. 모든 인간에게 유일하게 공통된 것은 ‘죽음’이다. 그렇기에 로마에서는 승전하고 돌아와 개선 행진을 할 때 개선장군의 뒤에서 ‘메멘토 모리’(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를 연이어 말하게 했다. 승리에 도취해 영원히 살 것처럼 보이는 건 다 허상이고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 그것을 기억해야지만 인간은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현재의 삶을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공통의 것’인가? 물론 그렇다. 단,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결과에서만 그렇다. 그러나 그 죽음의 ‘결’은 절대 공통적이지 않다. 이번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에 사는 일가족 세 명이 참변을 당했다. 발달장애인 가족이다. 침수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웃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이전 경험에서 시민은 이 폭우로 장애인이 누구보다 위험에 처할 것을 알고 걱정했지만 정부 당국만 외면하던 것의 참담한 결과다.

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이 운명으로서 인간 모두에게 ‘공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메멘토 모리’가 말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참변이 아닌가. 그것도 이미 경고됐고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는 반지하에 사는 빈곤 가족이 당한 참변 말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폭우는 공통적인 것이었지만 참변은 결코 공통적이지 않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스모그조차 얼마나 위계적인지 잘 안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지만 참변은 사회의 아래에서부터 겪는다.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덜 되는 것에 조금 슬펐다”는 말

결과만을 가지고 공통의 것이라고 말하는 건 참담한 죽음에도, 그리고 ‘공통’이란 말에도 얼마나 무례하며 무책임한가. 죽음을 ‘공통’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삶에 공통의 것이 있어야 한다. 그 공통의 것이 종언을 고했을 때 비로소 죽음을 공통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공통’일 수 없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붙이고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거야말로 공통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죽음이 죽음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감정이입, 죽음에 대한 이야기마저 공통의 것이 아니고 민주적이지 않음은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살인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 부모에게 감정이입한다. “오죽하면 그렇게 했겠느냐”고 말하면서 살해당한 자녀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사실은 그 부모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여기에서도 살해당한 장애인의 자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 중심적이지 않다. 감정이입을 통한 ‘공통의 마음’에 살해당한 장애인의 자리는 별로 없다.

이런 내 마음을 들켜버리게 한 글이 있다.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인 피플퍼스트 서울센터가 2022년 7월5일 낸 성명서다. 이 글은 누구나 읽어야 할 탁월한 글이다. 피플퍼스트는 발달장애인이 부모에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서 “우리(발달장애인)의 이야기가 ‘덜’ 되고 있는 것에 ‘조금’ 슬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덜’ 되는 것에 ‘조금’ 슬펐다고 말하는 그 표현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흔히 이런 성명서에는 ‘안’ 되고 있는 것에 ‘많이’ 분노한다며 이분법적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배제됐다는 것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누구도 소외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은 ‘덜’ 이야기돼 ‘조금’ 슬펐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효과로 읽는 이는 내 감정이입과 슬픔, 그리고 이야기의 위치는 더 ‘덜’과 ‘더’에서 어디에 가 있는지를 확연하게 느낀다. 글은 아무도 부끄럽게 하지 않았지만 글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말이지 이런 게 문장이고 글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회(제1423호 ‘저를 효녀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가 이 지면에서 쓴 글이 돌봄에 대한 글이며 돌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글에서도 나는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돌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다뤘다. 그 글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어쩌다 돌봄을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든지는 안 쓰나요? 사회에 쓰임이 다한 어쩌다 돌봄을 당하는 이가 곧 그대가 될 것이오’였다. 한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다 쓴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돌봄의 위험이란 이 댓글이 말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돌보는 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감정이입을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역시 저 성명서에 잘 나와 있다. 장애인의 삶은 돌보는 사람의 고통과 같게 이야기된다고 말이다.

돌봄을 받는 사람의 욕망

한 존재의 삶이 그를 돌보는 사람의 고통으로만 이야기된다는 건 무엇보다 돌봄을 ‘받는’ 사람을 욕망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그 욕망은 무엇이든 돌보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욕심으로 받아들인다.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특히 돌보는 이에게 감정이입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돌보는 이들은 반대로 그 사람이 욕망을 보일 때 기뻐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의 돌봄이 이에 대한 감정이입을 의도하지 않게 돌봄을 받는 사람들에게 ‘삶’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게 한다.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 공통의 것으로서의 삶은 욕심으로 부정당한다.

장애인은 나가서는 안 되며, 결혼해서도 안 되며, 무엇도 안 되며…. 안 되는 것뿐이다. 하려는 일은 모두 다 폐를 끼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오로지 그의 존재는 돌보는 이를 힘들지 않게 하는 것, 그것만이 욕망이어야 하며 그 경우에만 덕성을 갖춘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이들에게 모두 ‘공통의 것’으로 주어져야 하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박탈당해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돌보는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통제하거나 없애는 무욕의 존재, 즉 자기 욕망을 초월한 ‘현자’로서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득도’는 장애인의 욕망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러하기를 바라는 비장애인 욕망의 동일시에 불과한 것 아닌가?

놀라운 것은 삶에서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학자 권헌익이 베트남전 학살자의 가족들이 어떻게 추모하는지에 대해 쓴 <학살, 그 이후>에 대표적 사례가 있다. 베트남인들은 학살당한 조상을 어떻게 해서든 신당이나 사당에 모시려 한다. 그래야 그 죽은 조상이 비로소 망령이 아닌 자신들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유골을 수습하고 전통 절차를 따른 다음 망령을 신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당연히 그들은 망령이 제사상을 받으며, 조상이 되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이 제사 전체를 지도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 놀라운 환영을 본다. 망령들이 제사상 앞에 앉아 살아 있는 후손이 올리는 음식을 먹고 절을 받는 게 아니라 그들의 조상을 모신 사당을 향해 연신 절하더라는 것이다. 망령들의 염원은 조상이 되어 후손의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생전에 하지 못한 조상에 대한 절을 하며 드디어 후손이 된 것에 기뻐하더라는 말이다. 망령이 조상 숭배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환영을 보기 전까지 망령들은 단지 후손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에 불과했다.

참변을 당한 죽음 앞에서 누구에게 감정이입하는지는 전혀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오히려 감정이입과 기억, 추모조차 누구의 입장만이 사회적으로 보편적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 순간은 기억하고 추모하는 쪽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억‘되고’ 추모‘받는’ 쪽의 욕망을 살피고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과 동일시될 때 ‘각자의 삶’은 부정당한다. 욕망이란 ‘각자’를 지향하지 않는가? 성명서에서 “발달장애인에게는 분명, 부모와는 다른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라고 명료하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가 공통이어야 한다

성명서는 장애인들의 삶이 “‘돌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로 더 이상 우리의 존재가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로 끝맺는다. 누구나 각자의 삶이 있고, 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공통의 운명’이어야 한다. ‘각자’가 공통이어야 한다. 그리고 맞이하는 죽음이어야 공통의 운명이 될 수 있다. 이 ‘각자의 삶’이 그들의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부정당할 수 있다. 감정이입, 공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 이유다. 이 위험을 직시해야 우리가 추구할 ‘공통의 것’으로서 ‘삶’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바로 이 성명서와 같은 이야기, 말 걸기가 필요할 것이다. 당신의 욕망에 나를 동일시해 용해시키지 말라는 이야기 말이다. 각자로 존재함과 그렇지 못함을 가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불평등하다. 무엇보다 돌보는 이와 ‘받는’ 이가 서로에게 묶여 각자의 삶을 살지 못하게 속박하는 돌봄의 독박을 깨야 한다. 여기서는 서로를 위할수록 각자의 삶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 지옥을 깨고 삶이 각자에게 공통이 되는 ‘사회’를 요구하는 그 공동의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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