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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스펙트럼 우영우가 드러낸 비범한 ‘스펙트럼’

말걸기에 성공한 이야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매력 있는 주인공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드는 법
등록 2022-09-18 14:00 수정 2022-09-18 23:59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우영우는 이전에 재현됐던 자폐 장애인의 전형성을 뛰어넘는다. 자폐 스펙트럼처럼 한 집단 혹은 정체성 역시 스펙트럼이다. ENA 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우영우는 이전에 재현됐던 자폐 장애인의 전형성을 뛰어넘는다. 자폐 스펙트럼처럼 한 집단 혹은 정체성 역시 스펙트럼이다. ENA 제공

한동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가 화제였다.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존재가 주인공으로 나와 대중의 고정관념을 깨고 보이지 않던 내 이웃을 동료 시민으로 보는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끼친 듯하다. 지금 여기의 이웃에 대해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영우>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삶에서 ‘언제나 함께’ 있었지만 과거에는 무시하거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범주와 스펙트럼의 차이

이야기가 방영된 이야기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낳으며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지금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니 당연히 논란도 있을 수밖에 없다.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나 그 곁을 함께하는 이들이 “반가우면서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했다. 이것에도 여러 반응이 나오지만 모처럼 이야기에 대한 ‘비평’을 넘어 ‘말걸기’에 성공한 이야기가 나온 셈이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며 자기 또한 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우영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보고 학생들에게 어떤 새로운 주체를 다룰 때 ‘범주’와 ‘스펙트럼’의 차이를 깊이 생각해볼 것을 강조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자폐 스펙트럼은 ‘스펙트럼’이라고 명명됐지만 많은 논란이 스펙트럼을 ‘범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약간은 소모적인 이야기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전까지 말해지지 않았던 존재를 이야기에 등장시키면 그 재현된 사람이 그 사람이 속한 범주의 ‘대표’적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등이 과연 그 사람이 속한 범주의 대표로 여겨질 만한지를 둘러싸고 늘 논쟁이 일어났다. 범주적 사고에서는 대표(Representative)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되고 그 사람의 말이 범주의 말로 대변(Representation)되기에 상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중의 머릿속에 있는 남성 동성애자 이미지는 여성적인 존재다. 따라서 이런 인물이 등장하면 성소수자들의 담론 공간에서는 스테레오타입(전형성)을 재생산하고 게이 커뮤니티의 이미지를 망친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사실 게으른 매체들과 안이한 이야기일수록 대중의 일반적 이미지를 그 존재들의 보편적 이미지로 둔갑시켜버렸기에 정치적 비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이런 창작에서의 게으름은 소수자가 목소리를 다양하게 낼 수 없는 매체 담론 환경에서의 일이다. 곳곳에서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면 ‘대변’할 사람이 필요 없어지고 대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해진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안다. 한 범주 안에 아주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즉, 한 집단 혹은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일한 범주가 아니라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대다수 사람이 이해하게 됐다.

사고의 방식이 범주에서 스펙트럼으로 전환되면 더 이상 재현되는 존재의 대표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대표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존재도 스펙트럼 위의 한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지 전체를 대변하거나 포괄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현실을 볼 때 어떤 위치가 공중에게 발현하는 것이 더 전략적이고 효과적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어떤 위치가 사회적 현실에서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전략적 위치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창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창작자의 정치적 선택으로 재현되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갈린다.

이 시대의 말해지지 않은 암점을 직시할 때

따라서 스펙트럼의 어떤 위치를 선택해 이야기를 시작하고 구성할 것인지는 동시대 사회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동시대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어떤 위치를 말할지 달라진다. 이는 창작자가 자기 이야기를 텍스트 내부적으로 꼼꼼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이야기가 놓일 사회적 콘텍스트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의도와 달리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야기 내부를 잘 구축하는 것만큼이나 동시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동시대성이란 단지 이 시대의 ‘부정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성은 이 시대의 부정적 특징이라고 말해지는 것으로 은폐돼버리는 어떤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대다수 사람은 장애인이 차별받고 이동권에 심각한 제약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따뜻한 배려’와 동료 시민들의 돌봄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 이 시대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 부정적 현실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이런 이야기는 동시대성에 닿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만 미처 ‘살피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문제로 드러나지 않은, 더 나아가서는 이런 방식으로는 문제로 드러날 수 없는 이야기, 그것이 동시대성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대인이란 이 시대의 말해지지 않은 암점을 직시하는 인간이라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에 따르면 그 암점이 곧 동시대성이 된다.

동시대인이자 동시대성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동시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동시대의 암흑을 드러낸다는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가 되면 곤란하다.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사회고발극’이 소수자가 처한 비극적 상황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비극’이 되지 못한다. ‘비극적 상황’만 있지 ‘비극적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러하듯이 비극적 인물이란 운명에 도전해 파괴되는 순간조차 그 정신의 크기를 드러내는 주동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붐비고 바쁜 출근 시간에 휠체어를 밀고 지하철 문을 막아서거나 바닥을 길 때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주권자라는 말이 허구임을 선포함으로써 자신들이 주권자임을 증명하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가들. 장애 인권에서도 특히 말해지기 힘든 발달장애인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호소하는 것을 넘어 이 사회가 발달장애인에게는 실질적으로 ‘무욕의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한다는 것에 맞서 자신들을 욕망의 주체로 선언하면서도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언어를 다듬어 성명을 발표한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이들이 동시대인이며 이들의 이야기가 동시대성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대성을 다루는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논쟁이 그 재현된 주체의 대표성, 대변의 충실성이라는 범주적 사고에 갇히는 것은 좀 아쉽다. 그건 여전히 동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며 이는 동시대를 사유하는 동시대인(으로서 소수자 이야기꾼)에 대해 대단히 무례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가 사유하고 드러낸 것은 ‘고작’ 그가 위치한 스펙트럼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그렇게 분산하고 배열한 동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동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동시대인이라는 가장 멋진 주체들,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이 주인공은 전체를 대표할 필요도, 대변할 이유도 없다. 그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심지어 그는 ‘당사자’일 필요도 굳이 없다. 오히려 ‘친밀한 이방인’이 내부의 암흑을 더 확실하고 깊게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아직은 소수자인 당사자의 말을 듣는 ‘훈련’을 한국 사회가 더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당사자가 말해야 하지만 말이다. 강조하자면 부족한 것은 이 사회의 ‘듣는’ 훈련과 성숙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주인공

동시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저 사회 고발이거나 폭로이기만 하면 매우 시시하다. 안타깝게도 이른바 진보 진영의 서사가 그렇다. 진보 서사에서는 주인공의 매력이 안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있더라도 주인공이 주인공 같지 않다. 시대에 휘둘리기만 한다. 대개 이런 주인공은 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큐정전>에서의 아큐가 대표적이다. 이런 인물은 파멸해야 독자들의 삶에서 그 시대와 단절한 다음 이야기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매력적인 자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면 안 되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된다. 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매력적인 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 주인공일 때 매력적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누군가들의 대표로서 무엇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주권자로 선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면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변(Represent)이 아니라 선포(Manifesto)다. 이런 말과 행동이 어찌 멋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명시적인 주인공 한두 사람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다 이런 말을 하는 존재라면 그건 아마 가장 멋진 서사인 ‘혁명의 서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런 이야기는 희귀하다. 무엇보다 동시대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혁명을 가장한 낭만적인 영웅 서사도, 비극을 가장한 주인공 없는 폭로 서사도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공부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주인공은 충분히 주인공이냐고. 동시대인으로서의 주인공이냐고 말이다. 동시대인이 주인공인 그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답은 하나다. 지금 이 시대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과의 만남 말이다. 다음회에는 이 만남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를 이야기해보겠다. 검색이 아니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같이 고민해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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