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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간인 학살 추적 24년…기억은 기록으로, 기록은 사과로

1999년 첫 보도부터 돌아본 <한겨레21>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 24년
등록 2023-02-11 08:55 수정 2023-03-08 06:07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룬 <한겨레21> ❶제305호 ❷제306호 ❸제310호 ❹제334호 ❺제1196호 ❻제1356호 표지이미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룬 <한겨레21> ❶제305호 ❷제306호 ❸제310호 ❹제334호 ❺제1196호 ❻제1356호 표지이미지.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러고는 주검을 모두 불태웠어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1999년 5월 <한겨레21> 보도로 처음 실체를 드러냈다.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한베평화재단 이사)씨가 베트남 정치국에서 낸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을 입수한 뒤 학살 현장을 찾아 이를 확인한 것이었다.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미국 비밀 보고서도 발굴

구 통신원이 쓴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기사에 실린 한국군의 만행은 충격적이었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 개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신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는다.’ 200자 원고지 분량 27장, 5500자의 이 글이 이후 24년 동안 이어진 베트남 민간인 학살 보도의 시작이었다.

학살의 심각성을 파악한 <한겨레21>은 1999년 9월 제273호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특집기사로 보도를 이어갔다. 구 통신원이 한 달 동안 과거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베트남 중부 5개 성(도 단위), 9개 현(군 단위), 13개 사(읍면 단위) 수십 개 마을을 직접 돌아 100여 명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빈딘성·타이선현·타이빈사에서 맹호부대 3개 중대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1200여 명 학살, 빈호아사 청룡부대 1개 대대의 민간인 430명 학살 등을 공개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식 통계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베트남 사람들의 증언과 위령비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베트남 현지 보도가 이어지자 국내외 파장은 커졌다.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한겨레21> 기자를 찾아와 당시의 전투상황과 ‘양민학살’ 가능성을 증언했고, 이 증언 내용은 1999년 12월 <한겨레21> 제289호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죽였다”’ 기사로 보도됐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해병 중대장이 집단학살이 존재했다는 증언(제305호 ‘엄청난 일들, 34년 만에 말한다’)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2000년 1월11일 <한겨레21>의 취재 노력 등을 담아 ‘한국의 어두운 베트남전쟁 유산’ 특집기사를 보도했다.

양민학살 진위를 확인하는 취재도 계속됐다. 1972년 동남아시아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던 미국 민간인이 쓴 보고서를 입수해 “한국군은 아이들에게 과자와 사탕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들이 사탕을 나눠준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틀 뒤 언덕에서 내려간 남자들이 죽은 아이들의 입과 손에 사탕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제294호 ‘총성 소리만 듣고도 보복’)을 확인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실재했고, 이에 대해 한-미 간 의견교환과 협조가 이뤄졌음을 확인시켜주는 미국의 공식문서도 발굴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2000년 6월1일 30년 만에 비밀해제된 보고서(<한겨레21> 제334호 ‘잠자던 진실, 30년 만에 깨어나다’)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피해자인 현장 사진 20장이 담겨 있었다. 특히 이 보고서에는 2023년 2월7일 한국 법원이 학살 피해 베트남인에게 한국 정부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처음 인정한 판결에 등장하는 퐁니·퐁녓 사건이 실려 있다.

첫 보도 2년 만에 김대중 정부 “위로의 말씀”

취재 과정에서 1969년 한국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조사했다는 것도 처음 드러났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당시 해병 장교 등을 불러 조사한 뒤 “(박정희) 대통령이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시켰다”는 말을 남겼다.(2000년 5월 제306호 ‘베트남 양민학살, 중앙정보부가 조사했다’)

1999~2000년 <한겨레21>의 잇따른 보도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웅담과 경제성장을 위해 외화를 벌어왔다는 전투 파병의 당위성은 양민학살이라는 사실 앞에서 뒤틀어졌다. 미국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 군사개입을 정당화했다는 보고서 ‘펜타곤 페이퍼’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폭로해 베트남전 당시 반전 여론을 일으킨 것처럼 전쟁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2000년 6월27일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2005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로 명칭 변경) 회원 2천여 명이 <한겨레21> 보도에 항의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앞 도로를 점거하고 사옥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직원들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8월 베트남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꾸준한 후속 보도의 힘

<한겨레21>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양국 간 평화로 이어지기 위한 노력도 했다. 관련 보도가 시작된 뒤 1999년 10월부터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 성금 모금을 해, 2002년 9월까지 39개월 동안 당시 돈으로 약 1억5천만원을 모았다. 한겨레신문사는 2002년 ‘한국-베트남 어린이 문예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2003년 푸옌성 뚜이호아에 한베평화공원을 준공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실의 물꼬를 튼 뒤에도 <한겨레21>의 취재는 이어졌다. 한동안 잊혔던 1968년 퐁니·퐁녓 사건의 진실을 좇아 현지 증언을 다시 모아 ‘1968년 그날’(제980호) 기획을 2013년부터 1년 동안 연재했다. 1999년 첫 보도부터 사건의 진상을 취재했던 고경태 기자가 다시 베트남을 찾았다. 2018년엔 베트남 꽝남 학살 50주기를 맞아, 민간인 학살 희생자 가족들이 한국 정부의 사과를 여전히 받지 못한 채 진상규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전했다.(제1196호 ‘1968 꽝남대학살 위령비로 가는 길’) 이 기획은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이어 <한겨레21>은 2019년부터 ‘고경태의 1968년 못다 한 이야기’(제1249호)를 실었고,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인이 청와대에 낸 청원을 토대로 베트남전 당시 참상을 다시 기사로 전했다(제1256호). 기억은 기록으로, 기록은 사과로 이어졌다. 한국 법원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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