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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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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어머니가 10월의 딸에게 [10·29진실버스 동행 르포]

이태원 희생자 유족, 진실버스 타고 전국 돌며 5·18 유족 등 방문
참사가 반복되는 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
등록 2023-04-07 13:41 수정 2023-04-10 02:10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광주 5·18 희생자 어머니의 품 안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 같아서, 엄마 같아서.” 이태원 희생자 추인영씨 어머니 황명자씨가 울먹였다. “울아야대. 울아야대.” 1980년 광주항쟁에서 간호사로 시민을 치료한 안성례 할머니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유가족을 한동안 안아줬다. 2023년 3월30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광주 남구 양림동 오월어머니집에서 5·18 희생자 가족과 만난 때였다. 오월어머니집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에 ‘자식, 남편을 잃거나 본인이 다치거나 형제자매가 죽거나 다친’ 여성들이 모여 만든 곳이다.

“내 새끼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눈감지”

이날 10월의 어머니들은 5월의 어머니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저는 24살 딸이 있는 엄마였는데요. 지금 딸을 보낸 지 6개월 됐는데 시어머님께 아직까지도 이야기를 못했어요. 볼 자신이 없어서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태원 희생자 오지연씨의 어머니 임은주씨가 울음을 터트리며 입을 뗐다. “기가 막힐 일이재. 그래도 가족이 합심해야 하는 거야. 가서 안아줘.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말하셔요.” 안성례 할머니가 말했다. “잊으라는 것은 말이 쉽지. 죽은 새끼들이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알 때, 부모들이 그 뜻을 이뤄야만 눈감고 갈 수 있습니다.” 5·18 최초 사망자 고 김경철 열사 어머니 임근단 할머니가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이날 만남은 홍성칠 광주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의 안내로 성사됐다. 유가족 20여 명이 2시간가량 오월어머니집에 머물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수진씨의 어머니 조은아씨가 2023년 3월30일 광주 오월 어머니집을 방문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 임근단 할머니의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수진씨의 어머니 조은아씨가 2023년 3월30일 광주 오월 어머니집을 방문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 임근단 할머니의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2023년 4월5일은 참사 희생자 159명이 세상을 떠난 지 159일째 되는 날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10·29진실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았다. 진실버스는 3월27일 서울을 출발해 인천(27일), 청주(28일), 전주·정읍(29일), 광주(30일), 창원(31일), 부산(4월1일), 진주·제주(2일), 대구(3일), 대전(4일), 수원·서울(5일) 등 전국 13개 도시를 10일간 다녔다. 송진영, 오일석, 최선미, 최정주씨 등 유가족 4명과 대책위원회 활동가 2명이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다른 유가족은 사는 곳에 버스가 오면 참여하거나, 시간이 될 때 먼 지역에서 합류했다. 많을 때는 20여 유가족이 함께했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의 질문은 △정부가 수많은 인파가 예상됨에도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 △수차례의 112 신고에도 조치가 없던 것 △사고 발생 직후 적절한 응급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은 것 등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태원 참사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는커녕 면담 요청도 받지 않는다.

“네임, 네임, 큐알, 큐알, 네이버, 네이버”

이태원 참사 책임 규명을 위한 경찰 수사도 꼬리자르기 논란으로 이어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불송치(각하) 처분됐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입건 전 조사(내사) 종결 처분됐다. 보완 수사한 검찰은 2023년 1월18일 참사 현장 대응을 지휘한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총경)과 송병주 전 용산서 112치안종합상황실장(경정)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1월20일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국회에서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도 2023년 1월24일부터 45일 동안 이뤄졌지만 유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유가족은 △독립된 조사가 이뤄지는 특별조사위원회 설치 △참사 발생 원인, 수습 과정, 후속조치에 대한 책임소재 규명 △진상규명 내용 등을 담은 특별법(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는 진실버스 출발 사흘 전 이런 내용을 3월24일 국회 누리집에 국민동의 청원을 올렸다. 유가족들은 진실버스가 들르는 도시마다 시민들에게 특별법 취지를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네임, 네임, 큐알, 큐알, 네이버, 네이버.” 진실버스 첫날인 3월27일 오후 인천 남동구 사거리에서 유가족 ㄱ씨가 외국인을 잡고 말했다. 국회청원 동의가 되지 않은 외국인은 자필 서명만 하고 떠났다.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 앞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주영씨의 아버지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부대표가 말했다. “저희는 이태원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입니다. 저희 허락도 없이 검안하고 돌아온 아이는 알몸으로 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왜 변사처리됐는지, 왜 경찰이 마약 부검을 요청했는지 그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태원 유가족들은 전국을 돌면서 이전에 일어난 또 다른 참사 유족을 만나고 추모공간을 방문했다. 이날 인천 남동구 구월동 로데오거리에서 열린 시민문화제에는 24년 전에 발생한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가족 이재원씨가 참석했다. “그때도 학생들이 술집에서 술 먹다 사망했는데 세금으로 보상하는 게 말이 되냐. 이렇게 호도되고 있었어요. 학생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 사람들이 희생당한 거예요. 여러분처럼 (저희도) 구심점을 찾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다 같이 합심해 좋은 결과를 내주세요.” 3월30일 광주에서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유가족이 성금을 전달했다. 이태원 유가족은 4월3일 대구에서 중구 중앙로역에 차려진 ‘기억의 공간(추모벽)’에도 들렀다. 이곳은 대구지하철 참사 현장을 보존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24년 전 인현동 화재 유가족도 “좋은 결과를”

진실버스는 특별법 제정을 목표로 출발했지만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서로 만나고 위로해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가 유가족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서다. 3월29일 전주에서는 전북 지역 유가족들이 진실버스를 탄 유가족을 마중 나왔다. 전북 유가족들은 3월30일 광주 일정에도 함께했다.

광주항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옛 전남도청에서 3월30일 오전 이태원 희생자 유가족 간담회가 열렸다. 전남 장성에서 광주를 찾아온 유가족 박동환씨는 어렵사리 유가족들과 만났다. 그는 지난해 20살이었던 막내딸 박지해씨를 이태원에서 잃었다. 고개를 푹 숙인 박씨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도 잘 못하고 죄송합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워요. 아내는 집에 싹 불내고 죽어버린다니까 불안하고 말다툼도 하고요.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요. 지나가다 막둥이 집에 잘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도 못하고…. 상담을 받아도 마음에 와닿지 않아요.” 이태원 참사로 막내딸을 잃고 정신적으로 어려워진 박씨의 아내는 자살 충동을 겪어 요양원에 들어가 있다. 그도 직장을 6월에 그만둘 예정이다. 다른 유가족이 위로를 보탰다. “저희와 같이 있으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우리끼리는 가능해요. 그것도 하나의 치유 방법이거든요.”(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씨 어머니 최선미씨)

‘10·29진실버스 전국순회’를 마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2023년 4월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참사 현장 앞에서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10·29진실버스 전국순회’를 마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2023년 4월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참사 현장 앞에서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유가족들은 10일간 여정을 마치고 4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은 오후 4시께 이태원역 참사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용산 대통령실 앞 전쟁기념관을 거쳐 시민분향소가 있는 서울광장까지 비를 맞으며 2시간여 행진했다. 저녁에 열린 해단식에서 유가족들은 10일 동안 걸린 진실버스 소회를 밝혔다.

진상규명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세월호 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이태원 참사 이런 사회적 참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강제조사권을 가진 조사위원회를 만들 특별법을 요구합니다.”(송진영 이태원 유가족협의회 부대표·이태원 참사 희생자 송채림씨 아버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은 이제 첫발을 뗐다. 2023년 3월24일 시작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회청원에는 4월3일, 10일 만에 5만명이 동의했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은 서명 동참을 호소하며 이렇게 외친다. “법은 국회의원이 만들겠지만 그 국회의원들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 국민입니다.”

광주·인천=이정규 <한겨레> 기자 jk@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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