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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도 물고기다

베스트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큰 영향을 준 <자연에 이름 붙이기>
등록 2023-10-13 10:05 수정 2023-10-18 15:19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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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윌북 펴냄)는 출간 전부터 화제였다. 베스트셀러가 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 룰루 밀러가 가장 크게 영향받은 책이라는 점에서다. 분류학과 그 너머의 철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이야기가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저자는 한국계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작가 캐럴 계숙 윤. 진화생물학자이자 20여 년간 <뉴욕타임스> 과학 저널리스트로 일한 내로라하는 글쟁이다.

분류학이란 자연에 이름 붙이는 일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씨를 뿌리고 스웨덴의 칼 린나이우스가 싹을 틔운 분류학은 찰스 다윈을 거쳐 현대 과학 속에서 극적으로 변화한다. 생물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인 ‘분기학’의 사제들은 극단적으로 생물을 갈라치기 했다. 예컨대 분기학에서 물고기는 계통상 하나의 분류군으로 묶을 수 없었다. 물고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 된 것이다!

저자는 독일어로 ‘환경’ ‘세계관’을 뜻하는 ‘움벨트’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각자 지각하는 자기 세계를 가리킨다. 생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파악하고 내 위치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 칼라하리사막의 쿵산족부터 유럽인들까지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발전시킨 ‘민속 분류학’은 오히려 현대 과학보다 실제에 가까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오랜 시간 구축해온 경험적 세계인 움벨트를 등지고 그전까지 감각해오던 세계와 깔끔한 결별을 선언했다. 실험실 속에서 분자·디엔에이(DNA)·단백질 조각을 읽어내면서 난해한 분류학을 발전시켰다. 움벨트를 저버린 뒤 인지심리학적 혼란 속에 사람들은 생명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잃었다. 진화적 관계의 깔끔한 계통수 분류 작업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어류들처럼, 우리는 실제 세계와 단절됐다는 얘기다.

과학은 인류의 자산이다. 하지만 생명의 세계에는 과학 이상의 것이 있다. “고래도 (포유류라기보다) 물고기로 포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서로의 움벨트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움벨트를 갖는다는 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다는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망해가는 지구에서 회복적으로 살아가자는 중요한 제안이다. 하품 나는 과학 이야기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게 하는 솜씨, 복잡하고 아름다운 자연계만큼이나 경이로운 서술이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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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슨-레비스트로스 서한집

로만 야콥슨·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김성재 옮김, 읻다 펴냄,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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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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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날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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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유명한 사람보다 이름 없는 이를 기리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했다.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인 저자는 렘브란트·고야·쿠르베의 작품과 기록영화, 사진에 이르기까지 총 59개의 인물 이미지와 비평을 보여준다. 미학적 프레임, 얼굴이라는 혼과 몸 사이의 불안한 영역, 세계에 대한 정치적인 시선…. 잃어버린 민중의 이미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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