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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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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저주’에서 구해주세요

중국보다 발전하고 살기 좋은 한국에서 일어난 ‘배 사고’,
초등학생 딸의 질문과 중국인 시부모님의 걱정
등록 2014-05-23 06:11 수정 2020-05-02 19:27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한 지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한다. “한 달만 더 지나면 한국 사람들은 예전처럼 술 마시고 찧고 까불면서 가끔 우울하면 어딘가로 힐링하러 떠날 거야.” 한겨레 김봉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한 지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한다. “한 달만 더 지나면 한국 사람들은 예전처럼 술 마시고 찧고 까불면서 가끔 우울하면 어딘가로 힐링하러 떠날 거야.” 한겨레 김봉규

“엄마, 난 비행기만 (고장나서)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배도 물에 빠져? 배는 원래 물에서 떠다니는 건데 어떻게 물에 잠길 수 있어?”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며칠 전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숙제를 해야 한다며 도화지를 꺼내 그림을 그리면서도 ‘배가 물에 빠진’ 얘기를 멈출 줄 몰랐다. “엄마, 한국에서 배가 물에 빠져서 사람이 아주 많이 죽었어? 텔레비전에서 그러던데. 학교에서 우리 반 중국 애들도 그랬어. 니네 나라에서 배가 뒤집어져서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선장 아저씨도 도망가고 군인 아저씨들도 물에 빠진 사람들을 못 구했대. 엄마가 그랬잖아. 한국이 중국보다 더 발전했고 살기도 좋은 나라라고. 근데 왜 그래? 중국에서는 옛날에 큰 지진 나고 불났을 때 인민해방군 아저씨들이 다 구해줬는데. 우리 반 애들이 그러는데, 만일 인민해방군이 출동했으면 다 살릴 수 있었을 거래. 진짜야 엄마?”

주말에 한 번씩 우리 가족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는 중국인 시부모도 며칠 전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하는 말. “니네 나라에 큰 배 사고가 나서 사람이 많이 죽었더구나. 맘이 많이 안 좋겠다. 중국이야 워낙 나라가 커서 1년 내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서 그렇게 큰일이 났으니 얼마나 난리겠냐. 뉴스 보니까 한국도 그리 안전한 나라는 아닌 것 같더구나. 비행기도 안심할 수 없으니까 앞으로는 한국에 자주 안 가는 게 어떠냐? 네가 애들 데리고 한국 가는 것도 불안하구나.”

나름 걱정해준다고 하는 시어머니의 ‘충고’를 내심 거북해하는 표정을 읽은 눈치 빠른 시아버지가 재빨리 화제를 바꿔 ‘국면 전환’을 시도한다. “우리는 중국에서 그보다 더 험한 풍파와 재난도 다 겪어온 사람들이란다.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계급의 적’으로 몰려서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뻔도 했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제자가 스승을 때려 죽이는 것도 숱하게 봤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한 시대였는지. 근데 지금은 우리 같은 노인네들 빼놓고는 아무도 그 시절을 기억하거나 알지를 못해. 문화대혁명과 대기근이 뭔지도 모르는 젊은 애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런 건 학교 역사책에서도 안 가르쳐주니 모르는 걸 탓할 수는 없지. 그래도 난 우리 손주들에게 말해줄 거다. 이 할아비·할미가 얼마나 황당한 시대를 살아남아왔는지 너희는 알아야 한다고. 사람이 늙어서 치매에 걸리면 바보가 되고 ‘사람 동물’이 되는 것처럼 역사라는 것도 아무리 황당하고 기막힌 것도 다 기억해야지만 후대에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거야.”

시아버지에 비해 다소 ‘눈치 없는’ 시어머니가 이 대목에서 조금 역정을 낸다. “이 영감아! 그런 게 뭐 좋은 일이었다고 자자손손 얘기를 해서 기억하게 해. 집안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 소식이 문지방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데, 하물며 나라에서 그런 재난이 벌어진 걸 무슨 자랑거리라고 기억하게 만들어. 잊을 건 빨리 잊어버려야지. 너도 한국에서 일어난 ‘배 사건’ 같은 건 빨리 잊어버려. 바로 얼마 전에 중국에서도 말레이시아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는데 지금 누가 그걸 들먹거려? 죽은 사람만 불쌍하고 억울한 거지만 그래도 다 남의 일이잖냐. 좋은 일만 기억하기도 바쁜 세상이다. 우리 가족만 무사하고 아무 일 없으면 돼. 그러니까 되도록 집 문 밖을 나가지 마라. 나가면 죄다 사고니….”

눈치 없기는 시어머니 뺨치는 초등학생 딸과 아들은 입속 가득 밥을 미어지게 떠먹으며 우물우물 밥알 튀어나오는 ‘헛소리’를 한다. “엄마, 중국 인민해방군 아저씨들이 최고야. 인민해방군 아저씨들이 옛날에 ‘일본 귀신들’도 다 때려잡고 홍수 났을 때 사람들도 다 구해줬어. 한국에는 인민해방군 아저씨들 없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인터넷으로 한국 포털 사이트와 언론매체 기사를 보니 ‘어느새’ 연예 기사와 시답잖은 다이어트 관련 뉴스 ‘따위들’이 상위 기사로 올라오고, 세월호 여파로 각 지역 경제가 죽었다며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경제를 살리자’고 아우성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성토하는 나에게 한 지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저주하듯’ 내뱉는 말. “한국 사람들이 그렇지, 뭐. 한 달만 더 지나면 우리는 예전처럼 술 마시고 찧고 까불면서 가끔 우울하면 어딘가로 힐링하러 떠날 거야.”

얘들아! 중국 인민해방군 아저씨들이 정말로 뭐든지 다 구해줄 수 있다면 우리를 제발 ‘망각의 저주’에서 구해달라고 부탁해볼까?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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