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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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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가 사라져야 디스토피아를 막는다

코로나19 이후 학교는 변해야 한다, 미래 사회는 우리 아이들이 살 것이기에
등록 2020-05-16 07:36 수정 2020-05-20 01:34
또 다시 등교가 미뤄진 초등학교 교실에 책걸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연합뉴스

또 다시 등교가 미뤄진 초등학교 교실에 책걸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연합뉴스

“엄마는 너희가 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세상은 아닐 듯해. 교육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데 한 줄도 못 쓰겠어. 미래가 불확실한테, 교육은 뭘 해야 하는지,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큰아이가 말했다. “그러면 잘 모르겠다는 걸 써.”

작은아이가 말했다. “가르치려 하지 말자고 써.”

미래는 도래하나 선택하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 이후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다를 거라고 말한다. 성급한 이들은 벌써 BC(코로나 전)와 AC(코로나 후)로 시대구분을 한다. 이런 사회를 예측한다. 인수공통감염병의 주기적 발생, 신자유주의 소멸, 강력한 국가 출현, 정교한 감시체계, 비대면 접촉의 일상화, 온라인산업, 원격교육과 원격의료, 새로운 계급 출현…. 인류는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한데 자꾸 디스토피아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류종말을 경고하는 사람도 있다. 이대로 가면 인류에게 22세기는 없다고, 2050년 지구는 인류가 살 수 없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불과 30년 이후 일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지금 내 나이보다 젊다. 절박한 마음에 질문한다. 그런 미래는 전면적으로 ‘도래’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선택’할 수 있는가?

슈퍼히어로가 아닌 이상, 한 개인이 인류멸망(지구종말이 아니다. 인류가 멸망하면 지구가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이나 디스토피아를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들 힘으로 세상을 바꾼 경험을 해서인지, 나는 아직 집단의 힘을 낙관한다.

이번 싸움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달라야 한다. 첫째, 이전에는 늘 바깥에 있는 적과 싸웠는데, 이번에는 내 안의 적과도 직면해야 한다. 익숙한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그동안 알고 있었는데 지키지 않은 것을 반성해야 한다. 생명(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존중, 자연과의 공존, 민주주의, 소통, 협력, 연대의 가치 같은 것 말이다. 경계해야 할 건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파괴, 탐욕, 착취, 은폐, 무한 경쟁, 불평등 같은. 여러 사람이 일찌감치 주장했지만 내가 잘 듣지 않은 것들, 들었지만 절박하게 새기지 않은 것들이다.

둘째, 이번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어쩌면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지고) 대화에 동참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미래를 고스란히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지금보다 더 나쁜, 해결할 수조차 없는 세상을 억울하게 물려받지 않을 수 있다.

화살표 방향을 바꾸자

코로나19 이후 교육 변화를 예측하면서 많은 사람이 원격교육에 주목한다. 나는 그것보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세상이 멈췄다가 다시 작동하는 마당에, 새로운 세팅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이 지속가능한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해. 원격교육이 거기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학교는 다음 세대의 구성원이 모인 곳이다. 학교는 현재이자 미래이다. 나는 이제야말로 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교육 방식으로는 안 된다. 기성세대가 아는 지식과 가치를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하는 방식(화살표로 표시하면 위에서 아래로), 사회가 요구하는 기술과 태도를 학교가 받아서 가르치는 방식(화살표 방향은 밖에서 안으로), 입시 준비에 전념하는 교육 방식(화살표는 방향을 잃고 소용돌이에 빠짐)으로는 미래를 도모할 수 없다.

지금까지 방향과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대화’나 ‘탐구’를 하고, 사회 요구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교육 이름으로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말이다. 교육을 블랙홀에 빠뜨리는 입시는 사회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있는 한, 어차피 제도교육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음 세대를 살 아이들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하려면 ‘공정한 입시 경쟁’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가 필요하다. 아이들 발목에 채운 족쇄는 그래야 풀린다.

새로운 세대가 사는 법

영국은 두 달째 ‘록다운’(도시 봉쇄)이 계속되고 있다. 열일곱, 열여섯 살 된 우리 딸들도 집에 갇혔다. 아이들은 원래 집 밖에 나가기를 싫어했는데, 외출이 금지되자 가끔 장 보러 가는 것도 특별한 이벤트가 되었다. ‘풀메이크업’ 꽃단장을 하고 따라나선다. 평범한 일상이 귀해졌다.

얼마 전, 큰아이는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을 돕는 비정부기구(NGO)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코로나19가 발병해도 정부로부터 아무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이건 거의 인종학살 수준이라며 이러다 소수부족이 멸망하고 그들의 문화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인스타그램 팔로를 하는 브라질 친구가 소식을 전해주었단다. 록다운 이후, 아이는 온라인 주문을 받아 그림 그리는 일을 했는데, 그동안 번 돈을 페이팔(온라인 전자결제)로 구호단체에 보냈다. 나는 정체불명의 구호단체가 아닌지 잘 살펴보라 했고, 아이는 교차 검색을 한 뒤 돈을 보냈다. 우리 동네 노숙자가 걱정된다며 푸드뱅크에도 기부금을 보냈다. 작은아이는 이제 육류를 먹지 않는다. 원래 채식주의자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참에 시작했다. 채식 레시피를 검색해 자기 음식을 직접 만든다.

이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내가 아는 세상과 다르다. 아이들은 이런 실천을 ‘가볍게’ 한다.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소통한다. 불의에 분노하고, 실천을 조직한다. 누구든 시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생긴다. 그렇다고 자기 신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 경우, 생각은 무겁고 실천은 비장하다. 그래서 지금도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는 일 말고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말은 많이 한다. 가르치려는 습성을 못 버린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아이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는 일 같다. 꼰대가 사라져야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을지도.

큰아이는 록다운이 풀리면 환경단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한국 학생들도 기회가 되면 자원봉사 열심히 할 텐데.” 철없는 말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없잖아. 그리고 나도 한국에선 자원봉사 점수 때문에 했어.”

이스트본(영국)=이향규 <후아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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