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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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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를 좋아하세요?

등록 2019-12-05 00:59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이승만 시절에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으니 그냥 야담(野談)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느 날 생리 현상을 참지 못해 뿡 소리를 내며 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환자님, 이쪽으로 누우실게요”

그 말을 들은 이 대통령이 뭐라고 했을까? 전하는 말에는 “기분 좋고!”라고 했단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 들었다. ㄱ과 ㅎ이 합쳐지면 ㅋ으로 소리 나고, 역으로 ㅎ과 ㄱ이 합쳐져도 ㅋ으로 소리 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위 이야기를 양념 삼아 끌어들인 것이다. ‘각하’는 [가카]로, ‘좋고’는 [조코]로 발음이 된다면서. 당연히 우스갯소리였을 테지만 그 무렵 ‘만송족’이란 말이 나돌았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터무니없다고 여기기도 힘들다. 만송이라는 호를 가진 이기붕은 연로한 이승만을 대신할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이기붕을 찬양하기 바빴고, 만송족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고래로 권력자에게 빌붙거나 아부를 일삼는 자들은 끊이지 않았다. 요즘에야 그처럼 대놓고 아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주 사라졌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어용’이라는 말이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기도 하므로.

그런데 내 눈에는 권력에 대한 아부보다 더 심각한 아부 현상이 눈에 띈다. 상품소비사회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소비자에 대한 아부가 그것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손님을 다른 말로 하면 소비자, 즉 고객이다. 기업마다 ‘고객 우선’이나 ‘고객 제일주의’라는 말을 내세운다. 그래서 손님이라는 말도 불경하다 여겨 ‘고객님’이라고 높여 부른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잘못 사용하는 사물 존칭 표현으로 자주 거론되는 말이다. 고객을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지만 엉뚱하게 커피를 높여버리고 말았다. 이보다 더 심한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환자님, 이쪽으로 누우실게요.”

병원에 갔더니 간호사가 치료받는 이에게 이렇게 말하더란다. ‘-게요’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이다. “내가 먹을게요”나 “내가 치울게요”처럼. 따라서 ‘-게요’ 앞에는 높임을 나타내는 ‘시’를 넣을 수 없다. ‘내가 먹으실게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되겠는가. 그런데 앞의 간호사는 말은 자신이 하고 행동은 상대가 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실게요’라는 표현을 썼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고객을 왕으로 모시라는 고용주의 요구를 받들다보니 생긴 불상사다.

그런데 정말 상품 판매자는 고객을 존중해서 왕으로 대우하는 걸까? 당연히 그럴 리는 없고, 이유는 고객이 지갑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착각이다. 자신이 대우받는 게 아니라 지갑 속 돈이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존중받는 건 소비자의 지갑

지금 벌어지는 존대어의 과잉 현상은 상호 존중 속에 나온 게 아니라 자본의 포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고객이나 소비자의 위치에 설 수 없으니, 존중받을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그게 상품소비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전언이다.

박일환 시인*‘박일환의 노 땡큐!’를 이번호로 끝냅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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